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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Sep 14. 2024

아이들을 자라게 한 건 엄마의 약함

브로드 헤이븐_웨일스

아이들과 네 번째 떠나는 한 달 여행의 목적지는 웨일스였다. 네 번째 여행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모든 것이 낯설었다. 잉글랜드나 아일랜드도 아니고 왜 하필 웨일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의 첫 여행이자, 에어비앤비를 이용한 낯선 이의 집에서 지내는 첫 여행이자, 8주간 누워만 있던 허리 디스크 환자로 떠나는 첫 여행이었다.


왜 하필 웨일스? 모든 것이 낯선 첫 여행


세 번째와 네 번째 여행 사이, 나는 허리디스크 환자가 되었다. 강의준비를 해야 하는데, 다른 스텝들이 교통사정 상 아무도 도착하지 않아 할 수 없이 책상과 의자를 날랐다. 3개월 전쯤 퇴행성 디스크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멀쩡해 보이는 내가 급한 일을 피할 핑계는 되지 못했다. 의자와 책상 20여 개를 나르고 나자, 허리가 뻐근해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날 밤부터였다. 밤새 허리 통증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고, 나중에는 움직이지 않을 때도 통증 때문에 눈물이 났다.


지독히 더디기는 해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데 조금씩 희망을 가지며, 조심스럽게 여름 여행 계획을 구체화했다. 처음에는 부정적이었던 남편을 설득해 비행기 표도 티켓팅하고, 숙소도 전부 예약했으며, 일부는 선금을 지불하기도 했다. 떠나기 6주 전 며칠 애들 학교에 행사가 있어 참여했던 게 무리가 됐는지, 허리 상태가 다시 퇴보하고 말았다. 엉덩이부터 발바닥까지 저릿저릿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비행기를 타거나 캐리어를 들고 기차나 버스를 갈아탈 수 있을지 앞이 캄캄했다. 이미 저질러 놓은 일을 다 없던 일로 덮어야 할까. 취소로 인한 위약금 손실을 차치하더라도 아이들과 내가 키워 온 기대나 그동안 쏟은 마음과 시간은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아이들과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웨일스로 떠났다. 비행기 안에서는 안전벨트 사인만 꺼지면 뒤쪽으로 가서 서 있었다. 캐리어 두 개도 아이들이 하나씩 맡아 들었다. 어린 두 아들을 내가 데리고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두 아들이 아픈 엄마를 모시고 떠나는 여행이 되어버렸다. 한 달 여행 내내 아이들은 불평은커녕 더욱 의젓하게 아픈 엄마를 돌봤다.


브로드 헤이븐에서 머문 오두막



사람보다 양이 더 많다는 웨일스에서 차를 렌트하지 않고 여행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도시와 도시 사이는 시외버스나 기차로 이동하면 되었지만, 도시 내에서는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이 없었다. 웨일스 남쪽 브로드 헤이븐에 있는 오두막에 머물 때였다. 우유나 빵 같은 기본 식량을 구하러 작은 식료품 가게에 가기 위해서도 3,4킬로미터 정도의 산길을 걸어야 했다. 


식량을 사러 걸어야 하는 산길


다음날부터 사흘 내리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비가 오기 전에 서둘러 가게에 갔다. 파스타 소스와 파스타면, 우유, 빵과 빵에 끼워먹을 햄 덩어리, 사과 등을 담으니 장바구니가 꽤 무거워졌다. 아직 어린아이들이라 무겁다 투정 부릴 만도 한데, 아이들은 일부러 가장 무거운 소스 병이나 우유, 쌀 같은 걸 자기 배낭에 먼저 담았다. 아이들의 작은 배낭이 꽉 찼고, 추가로 식량을 담은 비닐봉지도 꽤 무거웠다. 도저히 아이들이 들고 갈 무게가 아닌 것 같아 비닐봉지 양쪽 끝을 큰아이와 내가 나눠 들고 걷기 시작했다.


무게 때문에 배낭 끈이 끊어진 큰아이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손으로 비닐봉지 손잡이를 들고 가던 큰아이가 다른 손으로 비닐봉지 안에 있는 사과봉지와 햄 덩어리를 꺼내고 들고 있는 게 아닌가. 

“엄마 허리 아픈데 무거운 거 들면 안 되니까, 봉지를 가볍게 하려고 그랬어요.” 

눈물이 핑 도는 걸 애써 참았다. 아이의 좁은 어깨에 무겁게 매달린 작은 배낭의 어깨끈 한쪽이 반쯤 끊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허리보다 가슴 한쪽이 시큰했다.


아이들이 파스타를 만들고 설거지도 했다


오래 걸어 피곤할 법도 한데, 아이들은 내게 쉬라고 하며 파스타를 만들기 시작했다. 냄비에 물을 끓이고 면을 삶았다. 병에 들어있는 소스를 부어 건더기 하나 없는 파스타를 만들었다. 집에서는 늘 밥 먹기 싫다고 밥을 남기던 막내아이마저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인지 그릇까지 싹싹 핥아먹었다.


엄마가 더 이상 자기들을 돌봐주고 키워주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아프고 연약해 오히려 돌봄이 필요한 존재로 변하자, 아이들이 자랐다. 내가 잔소리할 때는 절대 변하지 않던 아이들이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어른스러워졌다.


우리는 웨일스에서 많이 걷고 많이 웃었다 / 길치인 엄마 대신 지도를 보며 고민하는 막내아이


연인이나 부부도 긴 여행을 하다 보면 싸우고 심지어 도중에 헤어지기도 한다는데, 배고프고 지치고 힘들 때도 금세 서로를 돕고 힘과 지혜를 합쳐 손잡고 걸어가는 두 아이를 보면 세상에 이만한 동행도 없는 것 같다.

아이들을 강하게 하고, 자라게 한 건 의외로 나의 약함이었다.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고, 2024년 심리장편소설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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