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키키_미국
추리소설을 읽다 보면 청부살인뿐 아니라 청부자살이라고 해야 할까,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는 이들이 돈을 주고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종종 등장한다.
그때 받게 되는 질문: “어떤 죽음을 원해요? 어떤 죽음은 피하고 싶어요?”
마치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좋아해요?’라는 질문처럼 가볍게 들리는 그 질문에 나라면 뭐라고 답할까? 중국에 살면서 식당에 갈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제발 샹차이(香菜:고수)만은 빼주세요” 물론 샹차이 말고도 익힌 당근도 싫어하고, 귀찮게 껍질을 벗겨 먹어야 하는 게나 새우도 싫어하지만, 그런 걸 굳이 얘기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죽음에 관해서도 단 하나의 피하고 싶은 죽음이 있다.
“제발 익사만은 피해 주세요.”
중학교 때 해양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일주일 정도 바닷가에서 합숙 훈련을 받으며 수영을 배웠다. 마지막 날 바다에서 자유형으로 일정 거리를 헤엄쳐 통과해야 수료증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드디어 시험날, 숨 쉬기 위해 고개를 물 밖으로 내민 순간 갑자기 파도가 쳐 짠물이 코와 입을 덮쳤다. 공기를 들이마시는 대신 짠물을 잔뜩 먹었다. 더 이상 숨을 쉬어 볼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숨을 참으며 발을 구르고 팔을 저었다. 내 몸의 산소는 점점 줄어들어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았다. 간신히 수료증은 받았지만, 단 한 번의 지옥 같은 경험으로 나는 그 후 수영과 담을 쌓았다. 어른이 되어 생존을 위해 수영을 다시 배우긴 했지만, 발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여전히 허우적거린다.
두 아이를 데리고 수많은 바닷가를 다녔지만, 물에 대한 공포 때문에 나는 발조차 물에 담그지 않고 언제나 멀찌감치 앉아 책만 봤다.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아침 일찍 오리발과 스노클링 마스크, 공과 모래 장난감 등을 비치백에 잔뜩 싸들고 해변으로 향했다. 아기 때부터 물에서 놀았던 두 아이는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바다로 뛰어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서핑을 배우기 전에 부기보드에 몸을 싣고 파도를 느껴보고 있었다. 와이키키의 파도가 내 두려움이라는 견고한 성도 무너뜨려줄 수 있을까.
와이키키에 열흘이나 머물면서 서핑을 안 해본다면 평생 아무것도 도전 못하고 포기하는 삶이 될 것 같았다. 허리 디스크에 몸치인 내가 도전할 수 있는 종목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아이들의 응원에 힘입어 서핑 레슨을 받아보기로 결심했다. 결심하고도 얼마나 두려웠는지 밤새 잠을 설쳤다.
나는 와이키키 해변 전체에서 최악의 서퍼였다. 내가 서핑 보드에 엎드리면 홍해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비켜섰다. 어디로 튀고 어디서 갑자기 뛰어내릴지 몰라서. 엄청나게 많은 바닷물을 마시고, 그토록 두려워했던 바다에 수도 없이 빠졌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딱 한 번이지만 보드 위에 손을 떼고 설 수 있었다. (아무도 찍어 주는 사람이 없어 증거는 없다) 한 번의 성공 경험도 짜릿했지만, 더 소중한 건 그 전의 수없이 많은 실패의 경험이다. 실패가 생각만큼 그렇게 끔찍한 게 아니란 걸 알았다. 팔도, 어깨도, 목도, 허리도, 무릎도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아팠지만, 기분은 최고였다.
와이키키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마지막 미션 버튼을 눌렀다. 예약 버튼을 누른 순간부터 쿵쾅거리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난동을 부렸다. 생각만 해도 죽을 것 같은 공포. 내 두려움 때문에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건 아닐까. 물속에 머물러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몸서리치게 싫었지만, 비합리적인 공포를 이겨내고 싶어 스쿠버다이빙에 도전했다.
마스크에 물이 들어가거나 귀에 물이 들어갈 때 빼는 방법을 배울 때 공포가 슬슬 커졌다. 마스크에 물이 샐 수 있단 말이야? 누군가 치거나 해서 레귤레이터가 입에서 빠지면 당황하지 말고 옥터퍼스를 대신 사용하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 공포의 풍선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처음 레귤레이터를 입에 물고 호흡 연습할 때 타는 듯 목이 말라죽을 것 같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고, 폐는 금방이라도 터질 기세였다. 속으로 ‘그만 두자’를 백 번쯤 외쳤다.
막상 물속에 들어가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편안했다. 예상했던 온갖 나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살아 돌아왔다. 그것도 정말 째지는 기분으로. ‘두려움’이란 놈은 역시 어떤 일을 실제로 하기 직전까지만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솔직히 와이키키에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해변을 보며 속으로 냉대하고 있었다. 떠나는 날 아침 구름이 몽실몽실 떠 있는 파란 하늘에서 설탕가루 흩뿌리듯 여우비가 내렸다. 태양 아래 뜨거워진 살갗을 차갑게 톡톡 두드리는 빗방울. 톡, 톡, 톡… 콧등에 한 방울, 어깨에 한 방울, 전혀 무례하지 않고 가만한, 오히려 조금 상쾌한 건드림에 잠들어 있던 감각들이 조금씩 깨어났다. 쓸데없는 철벽은 깨뜨려주고, 잠들었던 감각은 깨워주는 이곳을 이제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와이키키 별 거 없네.”
막 도착한 듯 보이는 한국인 관광객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세상 어디를 가든 사실 별 거 없다. 각종 소셜미디어에 멋진 여행 사진이 넘치는 요즘, 어디를 가든 색다를 것 없다. 특별함을 알아보기 위한 마음의 문을 열기 전에는.
와이키키에 가면, 마음의 문을 열고 파도와 바닷물에 몸을 맡겨보자.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고, 2024년 심리장편소설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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