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승광재 _ 한국
다시 와 (으잉)!
승광재 대문을 나서는데 영미 씨가 건넨 말이다. 그 말은 진한 사투리 억양만큼이나 진짜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다시 오고 싶다. 내 방문 앞에 있는 감나무의 감이 익어갈 무렵, 꼭 다시 와서 보고 싶다. 붉게 잘 익은 감들도, 영미 씨도.
7월마다 두 아이를 데리고 한 달씩 여행을 떠난 지 7년째가 되었을 때, 우리는 우간다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자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었다. 예기치 못한 코로나19의 습격으로 우간다는커녕 다섯 달째 베이징에 있는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네 식구가 서울에 있는 원룸 오피스텔에 갇혀 지냈다. 여러 모로 여행하기에 좋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아이들과 나는 과감하게 한 뼘짜리 공간을 벗어나기로 했다.
사부작사부작. 기차를 타고 겨우 1시간 반을 달렸을 뿐인데, 시간은 몇 세기쯤 거꾸로 흘렀다. 전주에 있는 고택에 작은 방을 얻어 짐을 풀었다. 우리가 머문 방 바로 앞에는 감나무가 있었다. 아기자기한 마당의 푸릇푸릇한 나무 사이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쪽마루에 앉아 바라보았다. 대문 안에는 채 흐르지 못한 옛 시간이 가만히 고여 있었다.
천천히 걷다가 문득 서고, 다시 천천히 걷다가 잠시 멈추고 숨을 골랐다. 청국장이나 김치찌개에 밥을 먹고, 뜨거운 커피나 차를 마셨다. 어찌 보면 다를 것 없는 하루. 조금 더 느리게 걷고, 조금 더 많이 멈추었을 뿐이지만, 일상이 소중하던 시절이었다. 여행을 와서야 겨우 누릴 수 있는 기쁨이었다.
전주에 머무는 일주일 간 조선의 마지막 황손이 거주하는 승광재에 방 한 칸을 빌려 머물렀다. 황손이나 황손의 부인도 가끔 마당에 나와 친절하게 말을 건네주었지만,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건 영미 씨였다. 영미 씨는 아침마다 떡국이나 수제비, 흑임자죽, 감잣국과 밥 등 맛깔난 아침상을 차려주었고, 매일 깨끗이 빤 수건을 넣어 주었다. 도착하자마자 동네 사람들이 많이 가는 백반 집을 알려준 것도 영미 씨다.
영미 씨의 첫인상은 솔직히 사나워 보였다. 길을 헤매다 겨우 찾아온 우리에게 대문을 열어줄 때 보여준 그녀의 얼굴은 무뚝뚝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몇 마디 말을 나누자, 그녀가 마음의 빗장을 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음을 연 그녀는 머무는 내내 우리를 세심하게 챙겨 주었다. 푹 젖어버린 빨랫감을 탈수기에 돌려 널어주기도 하고, 전주에서 구경할 만한 곳을 알려주기도 하면서.
필요한 것 있음 암때나 전화 혀.
도착한 첫날 저녁 그녀가 전화번호를 불러 주었다. 휴대폰에 번호를 입력하며 뭐라고 적을까 고민하는 기색이 보였는지, 그녀가 이름을 불러 주었다. “영미.” 그녀가 이름을 또박또박 불러주는 것이 좋았다.
‘영미 씨’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녀는 나보다 열여섯 살이 더 많다. 나보다 네 살 어린 딸이 낳은 손주들이 고등학생이다. 영미 씨가 이름을 알려주고,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자 우리는 더 이상 오다가다 스쳐가는 이들이 아니게 되었다. 만약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면, 그녀는 ‘숙소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로 불리다 곧 잊히고 말았겠지. 하지만 이제 영미 씨는 전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되었다.
낯선 여행지에서 재미있고 놀라운 사람들을 만나 사귀는 이야기를 많은 여행 에세이에서 읽었다. 어쩌면 어디를 가느냐보다 거기서 누굴 만나느냐가 여행에서 더 중요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소심한 나는 여행지에서 입을 잘 열지 못했다. 숙소를 고를 때도 집주인을 대면하지 않는 방식을 선호했고, 어쩌다 집주인과 마주쳐도 길게 말을 섞지 않았다. 이런 내가 이상하게 전주에 와서 말을 많이 했다. 길 가다 모기 물린 곳을 긁고 있는 내게 약을 건네는 청소부 아주머니와 대화를 하고, 택시 기사님이나 카페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곳 사람들의 친절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영미”라고 그녀가 또박또박 불러준 마법의 주문 덕분에 용기가 생긴 거라 믿는다.
남은 여정 다시 움츠러들거나 사람들로부터 숨고 싶어 진다면 주문을 외워야지. “영미!”
(*영미 씨는 가명입니다. 진짜 주문은 저 혼자 간직하고 싶어서…)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고, 2024년 심리장편소설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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