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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Oct 12. 2024

아이들과 함께 첫사랑을 20년 만에 다시 만나면

프라하_체코

속수무책으로 내려앉은 피로에 짓눌린 모습에도
한 자락 우아함을 속내에 간직한 그 여인


프라하 하면, 목수정의 <월경독서>에 나오는 이 표현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프라하를 처음 만난 후 거의 20년 동안 프라하는 내 기억 속에 한 자락 우아함을 간직한 몰락한 귀족 가문의 귀부인으로 남아 있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프라하로 다시 향하는 건 마치 양손에 두 아이 손을 잡고 20년 만에 첫사랑을 만나러 나가는 길 같았다. 첫사랑은 그대로일까. 많이 변했을까. 그의 눈에 나는 얼마나 변했을까. 내 아이들은 어떻게 보일까.


프라하의 저녁놀


프라하는 아담한 도시에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그득하니,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프라하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았던 우아함 한 자락은 끝내 찾기 어려웠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첫사랑을 만나본 사람은 알 것이다. 옛사랑을 다시 본다는 건 기억 속에 보존해 왔던 환상이 깨지는 일이라는 걸. 우리가 세월을 이기지 못해 노화를 받아들였다면, 프라하는 쏟아지는 관광객의 발길을 이기지 못해 퇴색해 가고 있었다.


“… 프라하가 지난 백 년 동안 이렇게 엉망이 된 것도 놀랄 일은 아니야.
추한 도시는 추한 인간을 길러 내는 법이야.”


프라하는 쏟아지는 관광객의 발길을 이기지 못해 퇴색해 가고 있었다.


프라하에서 며칠을 보내며 나는 프라하를 떠올릴 인용문을 바꾸었다. 목수정의 문장 대신 체코 작가 밀로시 우르반의 <일곱 성당 이야기>에 나오는 이 문장이 다시 만난 프라하에 더 어울렸다. 프라하는 ‘프라하의 봄’을 짓밟아 뭉개는 소련의 탱크로부터는 자신을 지킬 수 있었을지 몰라도, 매일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관광객들로부터 우아함을 지키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프라하 풍경


첫사랑은 기억 속에 잘 보존해야지, 뒤늦게 다시 만나면 안 된다더니… 내 사랑 프라하를 그냥 기억 속에 고이 모셔두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물론 프라하가 감탄과 기쁨을 제공하는 훌륭한 여행지라는 데 여전히 동의한다. 단지 내 열렬한 사랑과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프라하가 사라졌을 뿐. 20년 만에 재회한 옛 애인과 편하게 아이들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삶을 슬쩍 나누는 관계로 들어가기로 했다.


프라하를 아이들의 시선에 맞춰 바라보기 시작하자, 다시금 신나는 곳이 되었다. 아이들과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잇는 곳에 있는 하벨 시장으로 걸어갔다. 몹시 작은 시장이라 금세 한 바퀴 돌아볼 수 있었다. 작은 기념품과 꽃, 과일을 눈에 담자마자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들과 함께 과일 가게 앞에 서서 과일을 골랐다. 아이들과 함께 블루베리와 라즈베리, 딸기 등 각종 베리 종류를 그득 담았다. 마침 시장 한쪽에 흐르는 식수가 있었다. 더운 오후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고 블루베리와 라즈베리, 딸기 등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씻었다. 깨끗하게 목욕을 한 블루베리를 입에 넣으니 더위가 싹 가신다. 사자마자 직접 씻어 먹는 과일은 어떤 찬 음료나 아이스크림보다 달콤하고 시원했다.


하벨 시장에서 베리 사먹기


한참을 걷다 배가 고프면 샌드위치를 사들고 눈에 보이는 아무 공원이나 들어갔다. 돗자리 같은 건 없지만 잔디밭에 철퍼덕 앉아 아이들과 샌드위치를 먹었다.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을 동시에 느끼며 배를 깔고 누워 책을 읽었다. 아이들은 축구공 대신 빈 콜라병 하나로 축구를 했다. 콜라병 하나로 한 시간 넘게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 우등상 받아올 때보다 흐뭇하고 기쁜 걸 보면 나는 좀 이상한 엄마인가. 아니다. 결국 살면서 우리가 진정 배워야 하는 건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찾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 그거면 되는 게 아닐까.


잔디밭에 주저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빈 병으로 축구를 하는 아이들


“유람선 탈까?”

“싫어. 빠질까 봐 무서워.”


안전제일주의인 막내 아이가 유람선 타기를 거부했다. 유람선이 무섭다고 안 타겠다던 아이가 갑자기 대신 작은 보트를 타겠다고 했다. 작은 보트가 더 위험한 것 아닌가. 아이는 작은 보트에서는 어린이에게 구명조끼를 입게 하니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구명조끼를 입히는 게 더 무섭다고 생각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사실 나도 구명조끼를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어른은 아무도 입지 않는 분위기라 말을 꺼내진 못했다. 막내 아이보다 겁이 더 많은 나는 보트 위에서 계속 벌벌 떨었다. 블타바 강에 유유히 떠 있던 우리 모습은 분명 몹시도 평화롭게 보였으리라.


블타바 강에서 보트 타기


우아함 한 자락을 잃어버린 건 프라하만이 아니었다. 첫사랑의 무너진 모습을 보고 실망했다고 했지만, 그 첫사랑을 만나러 나간 나 역시 그렇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우아함만이 아름다움이 아니듯, 첫사랑도 나도 오래전 그 모습이 아니라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에게는 우아함 대신 편안함이 있었고,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 저절로 지어지는 미소가 있다.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고, 2024년 심리장편소설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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