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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Oct 26. 2024

엄마, 나 이제 죽는 거야?

툴루즈_프랑스


프랑스에 한 달 머물 때,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한 일은 수영이었다. 파리에 머문 며칠을 제외하고는 날마다 수영을 했다. 툴루즈에 있는 친구의 집에도, 숲 속에 위치한 캠핑장의 모빌홈도, 15세기에 지어진 중세 스타일의 고성에도 에어컨은 없었지만, 수영장은 갖추고 있었다. 덕분에 에어컨의 인위적인 찬바람에 더위를 식히는 대신, 훌렁 벗고 시원한 물속으로 첨벙 들어가 더위를 피하는 자연스러운 방법을 터득했다


15세기에 지어진 고성에도 수영장이 있다


친구 집에 막 도착했을 때도 아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수영장에 뛰어든 일이었다. 중국에서 태어나 자란 우리 집 아이들과 프랑스에서 태어나 자란 친구의 아이들이 말이 통하지 않는 건 당연했다. 서로 서먹서먹해하던 아이들이 금세 친해진 곳도 수영장이었다


친구 집 마당에 있는 수영장


아이들이 수영장에서 즐겁게 물놀이를 하는 걸 바라보며, 친구와 나는 와인 한 잔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학교 때 만났으나 사회에 나간 후 거의 볼 일이 없던 친구와 나는 20여 년 간 쌓인 이야기를 쏟아냈다. 친구와 나 사이를 벌 한 마리가 윙윙거리며 날아다녔다. 친구 주위를 빙빙 도는 벌을 바라보다 친구가 벌에 쏘여 죽을 뻔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벌에 쏘여도 별일 없이 넘어가지만, 벌독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호흡곤란이나 쇼크 등 아나필락시스(anaphylaxis)가 갑자기 나타나면, 한두 시간 안에 병원에 가서 치료하지 않으면 급사할 수도 있다. 친구는 자신에게 벌독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벌에 쏘인 후 갑자기 쇼크가 왔다. 다행히 빨리 병원 응급실에 간 덕분에 위험은 면했지만, 의사가 큰일 날 뻔했다며 에피네프린을 소지하고 다닐 것을 권했다고 한다. 언제든 벌에 쏘이면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벌침 한 방에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친구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큰아이가 수영을 하다 말고 심각한 얼굴로 다가왔다.


아이가 가운데 손가락을 보여주는데, 피가 살짝 맺혀 있다. 뭔가에 찔렸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아이가 벌에 쏘였다고 했다. 이제 막 친구가 벌에 쏘여 죽을 뻔했던 이야기를 마쳤는데, 아들이 벌에 쏘였다니. 갑자기 다급해져 아들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벌이 물에 떨어졌길래 밖으로 건져내 주려고 두 손으로 물을 뜨고 있는데,
벌이 이렇게 물어 버렸어.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친구 이야기가 자꾸 떠올라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는 벌침을 자기 손으로 뺐다고 했다. 손가락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다른 손가락의 두 배 정도 두께로 부어오르자,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아이는 아프다고 울거나 떼를 쓰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아이도 벌독 알레르기가 있을까. 무서운 생각이 들어 급히 인터넷 검색을 했다. 벌침에 쏘여 아나필락시스 반응을 보이는 사람의 30%가 아토피 경력이 있다거나, 주로 O형 혈액형인 사람들에게 알레르기가 많다거나 하는 내용이 나오니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큰아이는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혈액형이 O형인 데다, 아토피 경력도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가 샤워를 시키고 옷을 갈아입혔다. 옷을 다 입은 아니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엄마, 나 이제 죽는 거야?


아이는 몸에 독이 들어갔으니, 곧 죽게 될 거라 여기고 있었다. 아이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이다. 엄살 부리거나 호들갑 떨지 않는 아이의 태도에 고개가 숙여졌다. 나라면 눈앞에 죽임이 다가왔을 때, 저렇게 침착할 수 있을까.

금방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하나도 안 무서웠어?

밤에 잠자리에 누운 아이에게 물었다.

응, 안 무서웠어.


죽음은 끝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우리가 마주해야 할 또 하나의 문일지 모른다. 아이는 그 문을 향해 가는 순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는 쇼크를 일으키지 않았고, 일주일쯤 지나니 붓기도 가라앉았다. 벌이 아이와 내게 남긴 건 ‘메멘토 모리’였다.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고, 2024년 심리장편소설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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