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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Nov 02. 2024

감자칩 한 봉지로 인한 갑을 관계

하와이 와이키키_미국

하와이 오아후 섬 와이키키 해변에 머물 때였다. 비싼 물가를 실감하며 우리는 주로 핫도그나 햄버거, 무스비로 끼니를 때웠다. 점심 메뉴로 막내아이는 하와이안 도그를, 큰아이는 하와이안 도그 콤보를 시켰다. 콤보는 감자칩과 음료가 세트로 함께 나왔다.


하와이안 도그를 먹는 막내아이


필요 없다고 시키지 않았지만, 막상 음료와 감자칩이 눈에 보이자 막내아이는 그게 먹고 싶어졌다. 형을 바라보며 나눠 달라고 쫑알거렸지만, 큰아이는 차가운 표정으로 음료와 감자칩을 움켜쥐고 나눠 주지 않았다. 겨우 감자칩 한 봉지와 음료 한 병으로 갑을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해가 지기 직전 와이키키 해변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는 아름다웃 바닷가 저녁 식탁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한 형제와 함께 ‘갑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소유가 주는 파워와 소유한 자가 보이는 교만에 대해.


하와이에서 주로 먹던 아침식사


예의 바르게 달라고 부탁하지 않고, 빨리 안 준다고 불평하니까 주기 싫었어.

겨우 감자칩 한 봉지와 음료 한 병을 더 가졌을 뿐이지만, 달라는 사람이 공손하고 고분고분하길 바라게 된다. 베푸는 내게 고마움을 표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차오른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갑질’의 욕망이다.

원래 다 같이 나눠 먹어야 하는 건데, 치사하게 안 나눠주잖아.

반대로 겨우 감자칩 한 봉지와 음료 한 병을 덜 가졌을 뿐이지만, ‘을’의 지위에 서면 쉽게 치사함과 억울함, 불평과 불만을 느끼게 된다.


하와이 오아후 섬


아이들이 훨씬 더 어렸을 때, 남편의 사업 실패로 수입이 뚝 끊긴 적이 있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같은 교회에 다니던 나이 지긋한 전도사님 한 분이 나를 찾아왔다. 생활비에 보태라며 두툼한 돈봉투를 건넸다. 꽤 많은 금액이 들어 있었는데, 나는 그 봉투에서 1원 한 장 쓰지 않고 바로 교회에 헌금으로 내버렸다. 그때 나는 그분이 베풀어준 은혜에 고마워하기는커녕 화가 났었다. 남이 베푸는 돈을 받아쓰는 위치에 선 것에 분노했던 것이다. 심지어 신에게도 화를 냈다.

하나님,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을의 자리에 섰을 때, 비굴하지 않되 겸손하고 감사하게 받을 줄 아는 마음.

갑의 자리에 섰을 때, 을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세심한 배려.


그때는 몰랐었다. 겨우 감자칩 한 봉지와 음료 한 병을 더 가지거나 덜 가질 때, 이 두 가지 태도를 잘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안 그러면 더욱 많은 것을 더 갖거나 덜 가질 때, 쉽게 잔인해지거나 비굴해질 수 있다는 것도.


모든 걸 사이좋게 나눠 먹는 형제


두 아이는 작은 봉지 안에 들어 있는 마지막 감자칩 한 조각을 반으로 쪼개어 나눠 먹었다. 병에 든 음료를 한 모금씩 마저 나눠 마셨다. 그 사이 해는 완전히 졌지만, 은은한 노을빛이 두 아이의 뺨을 물들이고 있었다.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고, 2024년 심리장편소설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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