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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내장, 시야는 줄어들지만 시선은 깊어진다

베를린행 기차 안에서

by 윤소희

모든 문학은 떠남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물리적으로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는 것이든, 믿고 의지하던 대상을 잃는 것이든, 익숙하고 안전한 곳을 벗어나는 것이든. 떠나는 순간 당장 문장이 튀어나오진 않겠지만, 문장이 움트는 자리는 언제나 그 ‘떠남’이라는 틈이라고 믿는다.


WechatIMG6831.jpg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서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을 떠나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뒤로 미끄러진다. 나는 마차에 몸을 싣고 고향 프랑크푸르트를 떠났을 열여섯 살의 괴테를 생각한다. 미지의 어딘가를 향해 떠났던 이름 모를 작가들, 그 수많은 등 뒤를 떠올린다. 독일을 가로지르는 선로 위에서 나는 책을 덮고, 오롯이 창밖을 바라본다. 마치 영영 다시 볼 수 없는 연인의 얼굴을 기억하려 애쓰는 사람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을 천천히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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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길 위에서 만나 세 번째 읽게 된 <희랍어 시간>에는 실명 위기에 놓인 남자가 나온다. 특수한 안경 없이는 코앞도 분간할 수 없는 상태. 내 성경 수업에도 시력을 잃어가는 분이 있다. 믿었던 눈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 속에서, 그는 지푸라기라도 붙들 듯 수업을 듣고 있다. 나는 몇 해 전 녹내장 진단을 받았고, 이번 여행엔 매일 점안해야 할 약조차 깜빡하고 가져오지 못했다. 일주일 정도라면 괜찮을 거라 여기지만, 눈은 이미 예민해져 희미한 빛에도 시리다.


요즘은 약이 좋아져 평생 관리만 잘하면 실명하지 않는다지만, 나는 자주 실명에 대해 생각한다. 처음엔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소중함에 더 가까운 마음이다. 내 시야는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어두워진다. 눈에 담을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줄어드는 감각 속에서, 나는 무엇을 먼저 바라볼지를 고민한다. 그 순서를 새로이 정리하는 삶. 그건 어쩌면 하나의 축복일지도 모른다.


이미 시력을 잃은 선배 작가들이 있다. 그들의 글에서 나는 빛이 꺼져가는 자리에서 태어나는 또 다른 빛을 본다. 시야는 줄어들지만 시선은 깊어지는. 떠나가는 풍경을, 아마 다시 보지 못할 풍경을 천천히 따라가며, 나에게 남아 있는 빛과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WechatIMG6835.jpg 베를린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앞에서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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