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챌린지_ Day 53
시험이 두 개나 겹친 날 아침, 아이의 눈이 다시 붓고 말았다. 특별히 큰 병은 아니지만, 몸이 예민할 때마다 반복해서 나타나는 신호다. 그날은 눈보다 아이의 마음이 먼저 무너져 있었다. “왜 나만 이런 걸 물려받았을까.” 아이의 말에 오랜 기억이 소환되었다. 어려서부터 자주 불편했던 눈, 남들이 던진 가벼운 말, 그 말들이 아이 마음속에 남긴 흔적. 시간이 흘렀어도 마음의 상처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사람들은 언제나 누군가의 이야기를 만든다. 어떤 이의 말속에서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또 다른 이의 말속에서는 뜻밖에 누군가의 삶을 밝히는 은인이 된다. 주인공은 분명 나인데, 서술자의 시선에 따라 전혀 다른 인물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타인의 시선'이라는 외부 내러티브의 본질이다. 불일치하는 이야기들 사이에서 우리는 늘 흔들린다.
나는 김미경 강사의 태몽 이야기를 좋아한다. 백마 탄 왕자가 수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손을 잡아주었다는 웅장한 꿈. 그는 인생의 고비마다 그 태몽을 떠올리며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나중에야 그것이 어머니가 상상력을 더해 지어낸 이야기임을 알았다고 했지만, 그 허구조차 한 사람의 삶을 떠받치는 내러티브가 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진실 여부가 아니다. 어떤 이야기를 자기 서사로 받아들이느냐, 그 선택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
우리 모두는 신화가 필요하다. 타인이 만든 불완전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선택해 써 내려가는 나의 이야기. 소문과 험담, 평가와 시기가 나를 흔들어도, 내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서사는 내 안에서 길어 올려야 한다. 글쓰기는 그 작업의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글을 쓰는 순간, 타인의 말에 덧칠된 흔적은 수정되고, 상처는 새로운 맥락 속에 다시 놓인다.
나는 아이에게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오래전에 쓴 기도일기를 펼치면, “오늘은 아이가 불안에 시달리지 않기를”, “아이의 마음이 편안해지기를” 간절히 적어둔 흔적들이 나온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은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아이는 묵묵히 이겨내며 성장해 왔다. 예민하기에 남을 잘 살피고, 힘들어도 자기 속도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모습은 꽃봉오리처럼 조용히 힘을 모으는 과정이었다.
아이의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행 1:8’이 적혀 있다. 내가 아이의 이름에 담아 전해준 성경 구절이다. 태몽 대신 믿음의 언어를 심어주었는데, 그것을 아이가 자기 서사로 받아들였다는 증거다.
우리는 누구도 외부의 소문과 평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내 삶을 규정하도록 내버려 둘 필요는 없다. 타인의 말이 흩날릴 때마다 나는 내 언어로 글을 쓴다. 파편처럼 흩어진 내 이야기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내며 내 정체성을 새롭게 직조한다. 아이 역시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이다. 바람처럼 스쳐가는 시선 속에서도, 결국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내 손으로 쓴 이야기. 글쓰기는 흔들리는 존재를 다시 세우는 가장 단단한 리추얼이다.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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