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챌린지_Day 54
“엄마, 요즘 사실…”
식탁 위로 젓가락이 오가던 순간, 아이가 입을 열었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나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 솔직함 덕분에 아이도 거리낌 없었다. 식구들 모두 진지하게 듣고, 저마다의 생각을 꺼내 놓았다. 이야기를 마친 아이의 표정이 눈에 띄게 가벼워졌다. 우리 집에서 고백은 잘못이나 수치를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짐을 내려놓는 일이다.
나는 아이들이 아주 어릴 적부터 사과하는 부모였다. 잘못을 깨달으면, 아이들 앞에서 바로 인정했다. “엄마가 미안해, 잘못했어.” 부모의 체면이나 권위보다 중요한 건 투명한 관계라 믿었다.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도, 먼저 고백하면 벌을 주지 않거나 가볍게 해 주었다. 실수는 누구에게나 일어나지만, 숨김은 더 큰 무게가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 덕분인지, 두 아들과 웬만한 이야기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눌 수 있다. 민망해 피하기 마련인 수위 높은 화제도 날씨 이야기처럼 담담히 오간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나의 어린 시절은 달랐기 때문이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도 부모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실망시킬까 두려웠다. 내 잘못이 아닐 때도 그랬다. 보호자보다는 재판관 같은 부모 앞에서 나는 조금의 흠도 드러낼 수 없었다. 외로움과 고독을 너무 일찍 배웠다. 그래서 내 아이들과 만큼은 서로의 민낯을 두려움 없이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랐다.
최근 다시 읽은 『죄와 벌』 속 라스콜니코프는, 고백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스스로 살인을 정당화하려 애썼지만, 죄책감의 무게는 그 어떤 논리로도 덜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다정하게 다가와도 “저 사람은 내 추악함을 모르니까 저럴 뿐”이라며 의심했고, 수없이 강물 위를 내려다보며 생을 끊을까 고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고백하기 직전 가장 괴로웠다. 법의 심판을 받고 유형지에서 벌을 받을 때보다, 아직 드러내지 못한 순간이 훨씬 무겁고 어두웠다.
고백은 나 자신을 타인 앞에, 그리고 무엇보다 내 앞에 드러내는 일이다. 더러운 얼룩이나 그림자도 빛 가운데 던지는 순간, 찬란한 빛이 된다. 내면을 짓누르던 무게에서 풀려나고, 존재는 새로운 삶을 얻는다.
글쓰기도 본질적으로 고백이다. 숨은 진실을 언어를 통해 빛 가운데로 끌어내는 일. 가장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이야기가 글이 될 때, 그 글은 독자의 가슴을 울린다. 화려한 수사보다 투명한 진실이 더 오래 남는다.
나는 아이들 앞에서만큼 독자 앞에서도 그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글을 쓸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문장 안에 내가 감추려는 수치는 없는가. 독자가 공명할 수 있는 진실을 은폐하지 않았는가. 숨기려는 마음과 드러내려는 마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한다. 여전히 나를 드러내는 일은 두렵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쓰면서, 고백하고, 고백하면서,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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