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챌린지_Day 82
진료실 문을 닫고 안내를 따라가며,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이미 겪어본 검사였고, 통증도 없을 텐데 괜히 긴장이 되었다. 옷을 갈아입고 눕기 전, 의료진이 물었다.
폐소공포증 같은 건 없죠? 그냥 시끄럽기만 해요.
아무 문제없으니, 천천히 심호흡하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말이 내 안에 들어온 순간, 무언가 달라졌다.
‘폐소공포증 같은 건 없죠?’ ― 그 문장이 귓속에서 계속 울렸다. 예언처럼, 아니, 마법처럼.
통 속으로 밀려 들어가며 나는 스스로를 달랬다. ‘이건 단지 기계일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하지만 머리 위가 천장에 닿을 듯 좁혀오자, 몸 안에서 낯선 파문이 일었다. 심장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뛰었다. 숨이 얕아졌다. 겨우 15분이라 했지만, 그 15분은 15년보다 멀었다.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러나 숫자는 점점 흩어졌다. 머릿속을 파고드는 굉음이 생각의 모양을 지워버렸다. 그 소음은 기계가 내는 소리가 아니라, 두려움이 내 안을 긁는 소리 같았다.
나는 기도했다. 빨리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계의 굉음보다 두려운 건 내 안에서 반복되는 목소리였다. “폐소공포증 같은 건 없죠?” 폐소공포증이라는 단어가 마치 주문처럼 현실을 만들고 있었다. 지식이 의식을 불러내고, 의식이 공포를 소환했다. ‘안다’는 것은 때로 위험하다.
세상을 아는 일, 병을 아는 일, 인간을 아는 일. 그 모든 앎은 우리를 구하지만, 동시에 가두기도 한다. 가짜 약을 진짜처럼 믿을 때 효과가 생기는 ‘플라세보’는 익숙하지만, 부작용에 대해 알면 알수록 부작용이 생기는 ‘노세보’는 덜 알려져 있다. 나는 MRI를 찍으며, 노세보를 온몸으로 겪었다. 앎이 만들어낸 두려움의 감각을.
처음 글을 쓸 때는 아무것도 몰라서 마냥 즐거웠다. 하지만 조금씩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쌓이면서 두려움이 시작됐다. 잘못 쓸까 봐, 틀릴 까 봐, 문장 하나에도 숨을 고르게 됐다. 아예 시작도 못하고 오랜 시간 앉아 있기도 한다. 나는 매번 문장 속으로 들어가 갇힌다. 두려움을 품은 문장은 늘 나를 시험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두려움을 끝까지 통과한 문장은 살아남았다. 회피로 쓴 글에는 체온이 없지만, 두려움을 견딘 글에는 숨이 붙어 있었다.
촬영이 끝나고 통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비로소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안과 밖의 공기가 너무도 달랐다. 바깥공기에는 삶과 자유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두려움을 지나온 자만이, 다시 숨을 쉰다.
문장 속으로 들어간다는 건, 밀폐된 관 속에 눕는 일이다. 언어의 관 속에서 두근거림을 견디고,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한다. 끝내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을 때, 비로소 바깥공기를 힘껏 들이마신다. 그 순간, 나는 다시 살아난다.
오늘도 또 하나의 좁은 문장 속으로 들어간다. 두려움을 아는 몸으로, 그러나 깨어 있는 의식으로. 그곳을 통과한 뒤에야, 나는 온전한 숨을 다시 쉴 수 있다.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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