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낯선 번호를 누른 7만 개 손끝 위의 외로움

100일 챌린지_Day 94

by 윤소희

오늘도 알람보다 먼저 눈이 떠졌다. 창밖은 아직 검은 바다처럼 고요하고, 세상은 내게서 한 걸음 물러나 있다. 그 어둠의 틈에서 나는 조용히 책상 앞에 앉는다. 차 한 잔이 식는 동안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더듬는다. 14년째, 나는 이 시간에 깨어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부지런함’이라 부르겠지만, 내게는 생존 방식에 가깝다. 쓰지 않으면 나 자신이 희미해질 것만 같았다. 문장을 잃는다는 것은 곧 나를 잃는 일과 다르지 않다.


며칠 전, 책에서 한 남자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는 노란 종이에 자기 전화번호와 짧은 문장을 적어 맨해튼의 거리 곳곳에 붙였다.

대화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전화주세요. 외로운 제프.

그 쪽지 하나가 놀라운 파문을 일으켰다. 7만 명의 사람들이, 심지어 다른 대륙의 사람들까지 그의 번호를 눌렀다. 망설임 끝에 낯선 번호를 누른 7만 개의 손끝에는, 얼마나 짙은 외로움이 쌓여 있었을까.


IMG_6217.jpeg 망설임 끝에 낯선 번호를 누른 7만 개의 손끝에는, 얼마나 짙은 외로움이 쌓여 있었을까


그 이야기가 오래 마음에 남은 건, 어쩌면 나 역시 매일 새벽마다 보이지 않는 노란 종이를 붙이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하얀 화면 위에 한 글자씩 남기는 문장은 누군가에게 건네는 작은 쪽지 같다.

‘혹시 당신도 이 새벽에 깨어 있나요?’

나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말을 건다. 언젠가 내 단어가 그의 마음 어딘가에 닿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으로.


새벽의 글쓰기는 나를 고독하게 하지만, 이상하게 외롭지는 않다. 글쓰기는 외로움을 고독으로 바꾸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나 자신’의 부재에서 오지만, 고독은 ‘나 자신’과의 동행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군중 속에서도 외로울 수 있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때, 마음은 가장 깊은 고립에 빠진다. 하지만 새벽의 책상 앞에서는 그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멀어질수록, 나는 내 안의 세계로 천천히 침잠하며, 거기서 잃었던 나 자신을 다시 만난다. 그렇게 나눈 나 자신과의 대화가 문장이 된다.


14년 동안 이어진 새벽의 습관은 이제 ‘의식’을 넘어 ‘신앙’이 되었다.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에 깨어 있을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믿음.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내 문장에 닿기를 바라는 간절함. 제프에게 7만 통의 전화가 걸려왔듯, 내 글에 공명하는 7만 번의 떨림을 상상한다. 설사 그 떨림을 내가 직접 느끼지 못한다 해도 괜찮다.


이 새벽, 홀로 누리는 고독이야말로 내 삶의 가장 충만한 순간이기에.




IMG_1829.HEIC 윤소희 작가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강연 신청 및 상위 1% 독서 커뮤니티 무료입장


https://link.inpock.co.kr/sohee_writer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