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챌린지_Day 93
요즘 『작은 아씨들』을 읽으며, 오래된 숲 속에서 반짝이는 조약돌을 줍듯 행복을 줍는다. 햇살 비치는 창가의 낡은 소파에 앉아 사과를 베어 먹으며 책을 읽는 조. 드레스는 닳고, 장갑은 짝짝이며, 구두는 작아 발목이 삐었지만, 세상 누구보다 즐겁게 무도회를 다녀온 메그와 조. 가난 속에서도 네 자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빛을 찾는다. 하지만 그들 웃음 이면에는 언제나 뭔가를 갈망하는 마음, '아직 도착하지 못한 행복'이 숨어 있다. 음악을 사랑하는 베스가 좋은 피아노를 가진 아이들을 부러워하는 장면을 읽으며 오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다섯 살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어느 날 콩쿠르를 앞두고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셨다. 얼마나 연습하는지 보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놀라서 금세 돌아가셨다. 집에 피아노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출장길에 사 온 장난감 피아노 하나. 간신히 두 옥타브가 될까 말까 한 그 피아노 위에서 나는 두 손을 번갈아 연습했다. 소리보다는 상상으로 멜로디를 완성하던 그 시간, 세상에서 가장 작은 건반 위에 내 꿈이 놓여 있었다.
결혼 후 내 가정이 생기자, 가장 먼저 피아노를 샀다. 음악을 사랑해서라고 믿었지만, 실은 그때의 빈자리를 메우고 싶어서였다. 피아노는 오랜 이사 끝에 여기저기 흠집이 났고, 마침내 낡은 가구 전락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피아노에서 소리가 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손에 넣은 순간, 갈망은 사라졌고, 대신 묘한 침묵이 방 안을 채웠다. 결핍이 사라진 자리에는 어김없이 권태가 찾아왔다.
처음 글을 쓸 때, 내겐 집필실은커녕 책상조차 없었다. 식구들이 잠든 새벽, 식탁 한쪽에 노트북을 펴고 글을 썼다. 그때의 적막은 방보다 넓었고,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내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결핍은 나를 밀어붙였고,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다. 그 시절의 새벽은 고단했지만, 가장 충만한 시간이었다.
이사와 책 출간을 거듭하며, 마침내 내 집필실을 갖게 되었다. 책상, 의자, 수많은 책들, 그리고 창문에 걸린 얇은 커튼까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곳에서는 글이 쉽게 써지지 않았다. 결핍이 사라지자 불씨도 사라졌다. 욕망은 남았지만, 갈증이 없었다. 물을 잃은 연못처럼, 나는 천천히 마르고 있었다.
우리는 결핍을 미워한다. 더 벌고, 더 사고, 더 바쁘게 살며 어떻게든 구멍을 채우려 한다. 하지만 충족의 끝에는 언제나 공허가 기다린다. 갈증이 사라진 사람은 물의 가치를 모른다. 결핍만이 가치를 아는 감각을 깨운다. 그 불편한 허기 덕분에 우리는 배우고, 쓰고, 사랑한다.
행복은 충족의 결과가 아니라, 결핍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은총이다.『작은 아씨들』의 네 자매가 그랬듯, 나 또한 여전히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는다. 어쩌면 내게 가장 결핍된 것은, 결핍 그 자체일지 모른다.
오늘 내가 찾아야 하는 보물은 행복이 아니다. 잃어버린 결핍의 자리다. 행복은 언제나 그 빈자리를 돌아 나오는 길 위에 있었다.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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