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사랑보다 먼저 늙어가는 기다림

상하이런민공원 (上海人民公园)

by 윤소희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안부보다 먼저 결과를 묻는다. 좋은 일 없느냐는 질문은 축복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삶의 진도를 확인하는 점검표처럼 들린다. 취업은 했는지, 아이는 어느 학교에 들어갔는지, 다음 단계로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반가운 마음은 식고 질문한 상대에게서 한 걸음쯤 뒤로 물러나고 싶어진다. 삶의 모든 영역이 보고의 대상이 되고, 사랑도 예외는 아니다.


런민공원 1.JPG 상하이런민공원 (上海人民公园)


얼마 전 나는 그 질문의 또 다른 형태를 보았다. 주말 오후 공원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무 그늘 아래 종이들이 가지런히 펼쳐져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들이 한 사람의 생을 압축한 이력서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이와 키, 학력과 직업, 호구와 거주지까지. 한 인간을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사랑을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차가운 정보들. 햇빛 아래 놓인 사랑의 조건들이었다.


“딸이에요, 아들이에요?”


한 여자가 지나가던 나를 붙잡았다. 아들이 있다고 답하자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열렸다. 아직 어리다는 말을 덧붙이자 그 빛은 빠르게 접혔다. 그 짧은 명암 속에서 나는 알았다. 이곳에 나온 사람들이 배우자를 찾는 당사자가 아니라, 기다림을 대신 떠안은 부모들이라는 것을. 자식의 미래를 손에 들고 서 있는 사람들. 사랑보다 먼저 늙어버린 기다림의 얼굴이었다.


런민공원 3.jpg 상하이런민공원 (上海人民公园) _ 자녀의 신상명세를 자세히 적어 전시한다


나는 한동안 종이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사랑은 언제부터 이렇게 증명 가능한 조건이 되었을까. 낯선 풍경이라 여겼지만, 이미 익숙하게 반복해 온 방식이었다. 우리는 소개받기 전 연봉을 묻고, 사진 몇 장으로 첫인상을 판단하며, 앱에서 필터를 설정한다. 공원 속 결혼 시장은 그저 우리가 마음속으로 하던 계산을 햇빛 아래 드러낸 풍경이었을 뿐이다.


런민공원 4.jpg 상하이런민공원 (上海人民公园)_ 나이, 키, 학력, 부모 연락처 등이 공개된다


언젠가 결혼을 내 나름대로 정의해 본 적 있다. 너무 함께 있고 싶어 했지만, 각자의 가족과 제도 속으로 편입되며 오히려 함께 하기 어려워지는 관계 맺기라고. 우리는 사랑을 자유라 부르지만, 그 자유가 실패할까 봐 가족 전체가 함께 불안해한다. 그래서 결혼은 끝내 한 사람의 선택으로만 남지 못한다.


공원에 나온 부모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았다. 서로에게 자녀를 맘껏 자랑하고, 처음 만난 이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맺어지는 인연은 많지 않더라도 그들은 희망을 펼쳐 놓고 있었다. 희망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끝내 불을 끄지 않는 마음이었다.


Weixin Image_20260124141300_2509_46.jpg 상하이런민공원 (上海人民公园)_ 유학 경력이 전시되고 석사 이상을 원한다고 말한다


생각해 보면 사랑은 늘 기다림이었다. 누군가는 직접 기다리고, 누군가는 대신 기다린다. 공원의 풍경은 사랑이 자연스레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조건을 지나 끝내 한 사람 앞에 멈추는 일이라 말한다. 바람이 불자 조건들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 순간 나는 믿고 싶어졌다. 그럼에도 사람을 만나게 하는 건 숫자가 아니라, 설명되지 않는 끌림이라고.


IMG_8221.JPG 상하이런민공원 (上海人民公园)


사람은 저마다 아직 펼쳐지지 않은 종이 한 장을 품고 살아간다. 그 종이를 끝내 접지 못한 채 바람 속에 서 있던 시간. 어떤 사랑은 한 자리에 오래 머물며 대신 기다린다.




IMG_5622.HEIC 윤소희 작가

윤소희 _ Story Lab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책과 함께' '독깨비'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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