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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ul 02. 2020

잃어버린 나의 외로움을 찾아

<외로워할 때는 외로워 하자> - 안도현 

외로울 때는 외로워 하자 3


-안도현



한 번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 한 권을 빼서 보려고 하다가 무척 애를 먹은 적이 있다. 책을 정리할 때 어찌나 빼곡하게, 어찌나 빡빡하게 책을 꽂아 두었던지 영 빠지지를 않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손가락 끝이 벌겋게 부풀어 오를 정도로 손이 아팠지만 책은 좀처럼 빠져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좁은 방, 좁은 책꽂이에 한 권이라도 더 많이 책을 꽂아 보려는 내 과한 욕심 탓이었다. 

그때 문득, 나도 빡빡한 책꽂이에서 빠지지 않는 한 권의 책처럼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이마를 치고 갔다. 그래, 나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도 가도 못한 채 지금 그렇게 끼어 있는 것이었다. 아니면 약간의 여유조차 가지지 못하고, 헐거운 틈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아등바등 만원 버스 손잡이에 매달려 여기까지 달려온, 아직도 철들지 못한 까까머리 통학생이거나……. 

그래서 나는 좀 천천히 살아 보자는 요량으로 10여 년 동안 정 붙이고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었다. 글쓰기와 가르치기라는 두 개의 축에 의지해서 정신없이 달려온 내 삶을 느리게 가는 수레 위에 싣고 싶었다. 

‘나는 정말 온몸으로 글을 쓰고, 온몸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자신 있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좀 더 열심히 글을 써 보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가르치는 일이 소홀해지고, 좀 더 좋은 선생이 되어야겠다고 작정을 하면 알게 모르게 글 쓰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는 자신을 발견하고 나는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다. 두 마리의 토끼를 헐레벌떡 쫓다가 그 두 마리를 다 놓쳐서는 안 되겠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괴롭힌 것은 살아갈수록 외로워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나는 잃어버린 나의 외로움을 찾는 길을 택하고 싶었다. 내가 몸에 꼭 죄는 바지를 싫어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더러 그런 바지를 즐겨 입는 사람을 보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헐렁헐렁한 바지가 다니기에도 여유롭고 벗을 때도 편하지 않겠는가. 외로움은 좀 헐렁헐렁할 때 생기는 게 아니겠는가. 

영국의 경제학자 슈마허는 일찍이 60년대 초반에 인간의 탐욕과 질투심이 결국은 인간성을 파괴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는 거대 기업에 의한 대량 생산 체제가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만든다고 했다. 현대 문명은 인간으로부터 외로움을 빼앗아 간다. 더 많은 것을 만들어 더 많은 것을 내다 팔기 위해 끊임없이 웅웅대며 돌아가는 기계 앞에서 도대체 인간은 외로워할 틈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이윤이 인간의 외로움을 상쇄시켜 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한낱 기계가 인간의 외로움을 어찌 알겠는가 말이다. 

다가오는 21세기는 그동안 인류가 외로움에 굶주렸다는 것을 자각하는 세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외로운 일 좀 있어야겠다.’는 말이 인류의 공동 구호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잃어버린 나의 외로움을 찾는 길을 택하고 싶었다.


외로움도 슬픔도 그 안에 푹 젖어 제대로 느끼고 누릴 수만 있다면, 

고통스럽기보다는 오히려 기쁨을 준다. 

정말 그랬다. 


다만 ‘외로움은 좀 헐렁헐렁할 때 생기는 게 아니겠는가’라는 시인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몸을 꼭 조여주는 바지 안에서의 외로움을 아마 제대로 못 느껴보았기 때문이겠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르게 생겼듯이, 각자의 외로움의 분량도 빛깔도 다른 게 아닐까. 


어쨌거나 

'외로울 땐 외로워 하자’. 

피하려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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