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서 외로울 때 미각은 예민해진다
결국 다시 죽을 끓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제부터 배가 아파 세 끼 연속 죽을 먹었는데, 배가 좀 진정되었다 싶어 어제 매운 음식을 먹은 게 화근이었다. 다시 설사가 시작되었고, 뱃속은 전쟁터가 되었다.
사실 흰 죽이 좀 지겨웠다. 다른 죽이 없을까 주방을 기웃거리다 정월대보름에 오곡밥을 만들어 보겠다고 사놓았던 곡물 봉투를 발견했다. 흰쌀에 검은색 쥐눈이콩과 붉은 기운이 도는 팥, 노랗고 작은 좁쌀, 거뭇한 수수, 그리고 찹쌀을 함께 믹서로 갈아 죽을 쑤었다. 가루처럼 잘게 갈린 곡식 알갱이들이 뭉근한 불 위에서 익어 간다. 눌어붙지 않도록 저어주며 기다리는 시간이 제법 길다. 아침은 늘 허둥지둥 차려내곤 했는데, 죽을 저으며 느긋하게 기다리는 이 시간이 낯설지만 좋다.
다 쑤어진 죽을 그릇에 담았다. 옅은 밤색이 도는 묽은 죽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1밀리도 안 되는 흰점과 검은 점들이 알알이 박혀 있다. 막 지어낸 구수한 밥 냄새에 살짝 풋내가 도는데, 입맛 도는 냄새라고는 할 수 없다.
녹두빈대떡을 부쳐 식구들의 아침상을 차려내고 막상 수저를 뜨려니, 벌써 죽이 살짝 식으며 막이 생겼다. 숟가락으로 죽을 뜨자 얇은 막이 주름지듯 구겨진다. 한 숟가락을 입 속에 넣으니 따끈한 열감이 입천장과 혓바닥, 입 전체로 퍼져간다. 얇은 막을 보며 죽이 다 식었구나 싶었는데, 목구멍으로 넘겨 보니 여전히 뜨겁다. 순간 으슬으슬했던 몸이 훈훈하게 덥혀진다.
소금도, 설탕도, 간장도 없이 전혀 간을 하지 않은 죽. 고소한 맛이 아주 살짝 돌지만 대체로는 싱겁고 허전한 죽을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열심히 떠 넘긴다. 아프니 죽을 먹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식구들이 먹고 있는 빈대떡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죽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고소할 빈대떡. 그저 침만 꿀꺽 삼킨다. 식탁 위를 망설이던 손이 백김치 국물을 한 숟가락 떴다.
국물을 삼키는 순간 느껴진 짜릿함이란. 탄산수를 마실 때처럼 톡 쏘는 상쾌함이 입 안 전체를, 몸 전체를, 아니 기분까지 시원하게 해 준다. 살짝 시큼하고 톡 쏘는 백김치 국물이 산해진미라도 되는 듯 숟가락질을 서두른다. 결국 유혹에 견디지 못하고 백김치 조각 하나를 베어 물었다. 아삭하며 씹히는 소리와 배추가 씹힐 때의 탱탱한 질감. 백김치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던가.
매일 많은 음식을 먹고 있지만, 맛을 제대로 느끼는 순간은 그리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먹을 것이 풍성한 요즘 겨우 백김치 한 조각에 감탄하는 건 불가능하다. 배가 아파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상황이 백김치 한 조각을 미식(美食)으로 만든 것이다. 미각은 아파서 외로울 때 예민해지는 모양이다. 백김치의 감칠맛이 결국 그리운 손길을 떠올리게 했다. 아플 때면 내 이마를 가만히 짚어주고, 배를 어루만져주던 따뜻한 손길. 그 손으로 아픈 내게 죽을 쑤어 줄 때면, 밍밍한 죽을 잘 넘길 수 있도록 백김치나 동치미 국물, 오이지 한두 조각을 내어주곤 했는데. 백김치와 함께 죽 한 그릇을 비워 내자, 멀리 있는 엄마의 따뜻한 손이 밤새 부글거리던 내 배를 어루만져 준 듯 뱃속이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