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수고와 희생을 전제하는 한국의 식문화
여행 중 한국 사람이 별로 없는 곳에서 한국음식점 간판을 발견해 반가웠는데, 마침 발견한 두 곳 이름이 모두 ‘Kimchi’였다. 하나는 웨일스의 수도 카디프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세인트 페간스 국립역사박물관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다른 하나는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시내에서. 두 군데 다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여행하는 동안 한국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기에 반가움은 더 컸다.
사실 나는 한국인이지만 김치 없이 살 수 있다. 여행하는 내내 아침에는 밀크티에 잼 바른 토스트 또는 시리얼을 먹는다. 한 끼 정도 외식을 하는데 피시 앤 칩스나 English Breakfast처럼 여행지의 가장 평범한 음식을 먹는 게 고작이다. 비타민 섭취를 위해 토마토와 오이, 사과나 납작 복숭아가 더해지는 지극히 소박하고 단순한 식단. 에어 비앤비로 빌린 누군가의 집 주방에서 된장, 고추장, 간장 같은 걸 기대할 수 없다. 가끔은 소금마저 없어 삶은 달걀을 그냥 먹어야 할 때도 있지만, 아이들이나 나나 불만은 없었다.
여행 중에는 조금씩 몸무게가 줄지만, 솔직히 그 단순한 식생활이 좋다. '무엇을 먹을까’ 하고 고민하는데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되고, 조리하느라 아이들 말을 건성으로 듣는 일도 없고. 복숭아를 한 입 물기만 해도 지극히 감동할 수 있는 단순함.
그러다 여행 말미 며칠 남편이 합류했다. 남편은 그동안 고생했다며 가는 곳마다 스마트 폰 앱으로 그 지역의 베스트 식당들을 검색해 데리고 갔다. 2,3일이 채 지나지 않아 남편은 한국음식을 그리워했고, 한국음식이 없으면 중국음식이라도 찾겠다며 스마트 폰 앱을 열심히 뒤졌다. 나는 자꾸만 배가 불렀고,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여행의 리듬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에이, 젠장, 그놈의 김치.”
애꿎은 김치한테 화풀이를 했지만, ‘김치’로 상징되는 여자들의 노력과 수고, 인내와 희생을 전제하는 한국의 식문화가 싫다.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날부터 나는 새벽부터 아침상을 차리느라 분주해진다. 국물이 꼭 있어야 하고, 밥과 국만 달랑 내어 놓을 수 없으니 뭔가 따뜻한 요리를 준비해야 하고, 거기에 김치와 밑반찬들을 내고. 허덕허덕 먹고 치우고 나면, 이제 다음 끼니는 무엇을 해서 먹여야 하나 고민하고 씨름해야 한다. 숨이 막힌다.
여행 중 먹고사는 일의 고단함과 숭고함에 대해 노래하던 나는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어느새 먹고사는 일의 비루함에 대해 투덜대는 자가 된다. 다시 길 떠날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단순한 여행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