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삶에 임하는 진지한 자세
내 집에서는 절대 하지 않지만, 다른 곳에 가면 가장 나서서 하는 집안일이 있다.
바로 설거지.
타입 1: 손끝에 물 한 번 묻히지 않는 타이타이(太太:사모님) 형
집에는 ‘아이 (阿姨: 가사 도우미)’가 있어 굳이 내 손에 물 묻혀 설거지를 할 필요가 없으니 감사하다. 일주일에 한 번 아이가 오지 않는 일요일에도 나는 절대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 그냥 그릇을 차곡차곡 산더미처럼 쌓아 놓을 뿐. 그만큼 절대 하기 싫은 집안일이 설거지다.
타입 2: 맨손으로 구정물에 손을 담가 설거지하는 며느리 형
그러다 시댁에 가면, 가자마자 소매를 걷고 부엌 싱크대 앞으로 달려간다. 시어머니가 가장 하기 싫어하는 집안일도 설거지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유명 요리사 뺨치는 실력으로 자주 손님을 초대해 각종 요리를 만들어냈던 어머니지만, 설거지만은 가사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셨다. 요리 잘하는 사람들이 ‘음식 만드는 건 좋은데, 치우는 건 싫다’고 말하는 걸 수도 없이 듣지 않았던가. 몇 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진 적이 있어 설거지나 청소 같은 집안일이 어머니에게는 버거운 노동이다. 그러니 어쩌다 한번 오는 외며느리인 내가 설거지를 돕는 일은 당연한 일.
집에서는 어쩌다 설거지를 할 때도 반드시 고무장갑을 낀다. 그런데 시댁에 들어가는 순간 갑자기 전혀 다른 내가 되듯, 씻어야 할 그릇이 가득 담긴 구정물에 맨손을 담근다. 그곳에서는 고무장갑이 오히려 불편하고 맨손으로 더러워진 그릇들을 뽁뽁 닦아 내는 게 더 좋은 그런 며느리로 변신하는 것이다.
타입 3: 배탈 난 배를 부여잡고 대가족의 설거지를 도맡아 하는 갈등예방자 형
몇 년 전, 친구 두 가정과 함께 프랑스를 여행할 때도 그랬다. 한 친구는 요리를 맡고, 프랑스어를 잘하는 다른 친구는 재료 구입과 기타 잡일을 맡고, 세 가족 열두 명이 먹은 그릇들을 설거지하는 일은 내가 맡았다. 요리는 당연히 먹는 데 조금이라도 까다로운 사람이 맡아야 한다. 나는 한 달 내내 바게트만 뜯어먹으래도 군말 없을 타입이니, 무슨 음식을 먹을까 고민하고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내는 데 적합하지 않다. 세 아이 입맛이 다 다르고, 그중 하나가 유독 까다로워 한국에서 올 때 많은 식재료를 들고 온 친구가 요리를 맡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주로 남들이 먹고 남는 음식을 소비했고, 마지막에 남는 설거지를 맡았다. 그것이 함께 여행할 때 생길 수 있는 모든 갈등을 애초에 방지하는 길이라 믿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한 달 여행 중 열흘 이상을 설사와 배탈로 멀건 숭늉만 간신히 삼키며 지낼 때에도 나머지 열한 명이 먹고 남긴 그릇들을 열심히 씻었다. 이런저런 이유야 누구나에게 생길 수 있지만, 그런 이유로 자기 책임을 회피하면 반드시 갈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연인이 함께 가도 싸우기 쉽다는 장기 여행을 세 가족이 무사히 마치고, 심지어 ‘또 함께 가고 싶다’는 말이 오가는 훈훈한 분위기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겨우 ‘설거지’ 하나에 대한 자세와 태도지만, 누구와 함께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이렇게 변신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끔은 놀란다. 누군가는 가증스럽다할지 모르지만, 이런 변신의 기술이야말로 진지하게 삶에 임하는 자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