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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남자는 남편일까, 아빠일까?

끝까지 곁을 지키는 사랑

by 윤소희

집 근처를 천천히 산책하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사실 여인도 휠체어도 그리 눈에 띄지는 않았다. 내 시선을 잡아끈 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여인의 발과 다리를 열심히 주물러 주는 남자였다. 재활 운동을 하는 여인은 어쩐지 그 장애가 익숙지 않아 보인다. 사고를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다. 원망과 불안, 수치심이 잔뜩 묻어있는 여인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 얼른 시선을 돌렸다.


놀이터 한편에 있는 운동기구를 붙들고 힘겹게 일어섰던 여인이 잠시도 못 버티고 휠체어에 주저앉는 모습이 보인다. 남자는 다리를 다시 열심히 마사지하며 여인에게 뭐라고 계속 속삭인다. 남자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몸짓만은 몹시 간절해 보였다.


“저 남자는 남편일까, 아빠일까?”


우문인 줄 알면서도 같이 걷고 있던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였을까. 어쩌면 남자와 여인의 관계가 궁금했던 게 아니라, 나를 정말 사랑하는 이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여인과 같은 비극적 사고가 발생해 스스로를 포기하고 싶어 질 때도 곁에서 나를 일으켜줄 사람이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어서.


수많은 달콤한 고백들, 심지어 목숨까지 거는 약속과 맹세를 들어봤지만, 그 고백과 맹세를 했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지금 내 곁에 없다. 심지어 사랑한다며 제 눈이라도 뽑아줄 것 같던 사람이 헤어졌다는 이유로 내 눈알을 뽑으려고 달려드는 살기를 보인 적도 있다. 나 역시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상대에게 무엇이라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걸 줄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랑이 지극히도 허약한 것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토록 결연해 보였던 의지가 삶의 풍파에 몹시 흔들리다 마침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걸 보는 건 처참했다. 내 안이 텅 비어있는데 그 안에서 사랑을 꺼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내 사랑이란 잔뜩 바람만 들어 결국 터지고 말 풍선 같은 것이었을 뿐.


이제는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달콤하고 로맨틱한 고백도, 모든 것을 거는 약속이나 열정도 전혀 부러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놀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친 휠체어 탄 여인 앞에 쪼그리고 앉은 남자의 간절한 손길만은 몹시 부럽다. 남편인지 아빠인지조차 쉽게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남자의 모습은 흐릿했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은 여인의 곁을 끝까지 지켜주는 그 사랑만큼은 빛이 났으니까.


휠체어.jpg 남자의 사랑이라면 여인을 분명 다시 걷게 도울 수 있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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