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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un 04. 2020

불필요한 해명을 미치도록 하고 싶을 때

오븐 없이 크루아상을 구우려다 불 낼 뻔한 후

갑자기 타는 냄새가 나 전자레인지를 열어보니, 하얀 연기가 쏟아져 나온다. 작은 스튜디오는 금세 뿌연 연기로 그득 찾고, 손바닥만 한 창문 두 개로 환기를 시키는 건 쉽지 않았다. 크루아상 생지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린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왜 하필 맛보라고 보내 준 신제품 중 직접 굽는 크루아상이 눈길을 끌었는지. ‘오븐 없이 빵 구웠어요’라는 블로그 몇 개 달랑 읽고 전자레인지로 빵을 구워 보겠다고 덤비다 불을 낼 뻔했다. 


노릇노릇 구워진 크루아상을 상상했으나 얻는 건 매캐하고 자욱한 연기 뿐


초인종 소리가 몹시 초조하다. 문을 열자 경비원 두 명이 들어섰다.

“소방 알람이 울려서 와 봤습니다.” 

 

경비원은 사태를 바로 파악한 듯 화재가 났을 때 여는 비상용 큰 창을 열어 주었다. 이런 일이 제법 많다는 말로 당황해하고 있는 나를 위로해 주었지만, 정작 내 귀에는 그런 위로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작은 방 안에 네 식구의 빨래가 여기저기 걸려 있고, 아직 버리지 못한 분리수거용 쓰레기가 현관 앞에 쌓여 있다. 책상 하나에 두 아이와 내가 한 귀퉁이씩 차지하고 노트북을 펴 놓고 있는 풍경. 삶의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문득 '우리는 여기 사는 게 아니라, 사정이 있어 잠시 머무는 것뿐'이라고 해명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아는 사람도, 다시 볼 사람도 아니고, 심지어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왜 미치도록 해명하고 싶은 걸까? 


얼마 전 읽은 단편소설에 성대결절 수술을 받은 환자가 나왔다. 수술 후 몇 주 간은 ‘어’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말을 일절 할 수 없다. 만약 어기고 말을 하면 영원히 목소리를 잃게 될 수도 있다. 수술 후 처음 택시를 탔을 때, 그는 목적지 주소를 적어 택시기사에게 전했다. 그 주소를 보고 아무 말 없이 운전을 시작하는 택시기사를 보자, 그는 자기가 원래 말 못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변명을 하고 싶어 못 견디겠더라고 했다. 자기 자신을 해명하고 싶은 충동이 맹렬했다고.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고 잠시 머무는 것뿐이라는 불필요한 해명은 그토록 하고 싶었으면서, 정작 뭘 태웠느냐고 묻는 경비원의 질문에는 끝내 답하지 못했다. 오븐이 없어 전자레인지로 크루아상을 구우려고 했다는 게 무슨 죄도 아닌데.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삶을 추구하지만, 잘 안 될 때가 있다. 남의 시선에 얽매이게 될 때는 주로 내가 스스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거나 못마땅하게 여길 때다. 괜히 남의 시선을 빌어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연민에 빠지는 것이다. 


연기는 하루 만에 모두 빠져나갔지만 방안에 매캐한 탄내가 오래도록 배어 있다. 구석구석을 닦고 피톤치드 스프레이를 수도 없이 뿌리지만, 탄내가 다 빠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미치도록 해명하고 싶은 그 순간 침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 순간 입을 다물고 견디면 해명하고 싶은 욕구 뒤에 숨어 있는 진짜 내 모습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침묵의 시간이 정말 하고 싶은 나만의 말을 찾아가는 시간이라고 믿는다. 탄내가 빠지는 시간만큼 몹시 지루하고 긴 시간이겠지만, 내게는 꼭 필요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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