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영혼과 육체의 실을 엮어 직물을 짜는 일
“섹스하면 연상되는 과일은?”
남편에게 물었다.
“글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누가 그런 걸 자발적으로 생각해 보고 그러겠는가, 글을 쓰는 ‘미친’ 작가들이나 그러지. 나 역시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Writing Down to the Bones)>에서 이 질문을 글감 중 하나로 발견하지 않았다면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뭐 생각나는 거 없어?”
“글쎄… 바나나? 복숭아?”
역시 뻔하고 진부한 대답.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 순간 나 역시 속으로 '바나나나 복숭아?’ 하고 있었기에 뜨끔했다.
다시 천천히 생각에 잠긴다. 굳이 뭔가 먹을 것을 연상하라면 비릿하고 짭쪼름한 해산물이나 향이 진하고 맵고 알싸한 그런 이국적 음식들이 떠오르는데, 과일이라니. 결국 생과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과일에 손을 대기로 결심 했다.
한여름 잘 익은 참외를 잘 씻어 껍질째 얇게 슬라이스 한다. 참외 겉에 하얀 밀가루를 얇게 골고루 묻힌다. 커다란 볼에 밀가루에 물을 섞어 걸쭉한 반죽을 만든다. 그리고 그 반죽에 짭쪼름한 쌈장 한 숟가락을 듬뿍 넣어 잘 저어 준다. 반죽에 얇게 저민 참외를 담갔다가 기름에 노릇하게 부쳐낸다. 아삭하고 달콤한 참외에 짭쪼름한 쌈장 맛, 그리고 고소한 기름 냄새까지. 달콤 짭쪼름한 참외 부침이라면 조금 가까이 다가간 걸까?
그 순간 문득 책 한 권이 떠올라 책장으로 달려가 뽑아 든다.
"...잼은 새벽의 고요함 속에서 졸인다.
세상이 완전히 어둠에 싸여 소리를 잃은 밤, 살짝 씻어 꼭지를 딴 딸기를 통째로 작은 냄비에 넣고 설탕과 함께 끓인다. 그것뿐이다. 그러면 밤의 정적 속에 감미로운 향기가 섞이기 시작한다. 어둠과 침묵 속에서 천천히 누그러지는 과실을 독차지한 행복감으로 벅찬 기분이 든다. 냄비 속 딸기가 스르르 부드러워지면 마무리로 레몬을 몇 방울 톡, 불을 끄고 그대로 둔다.”
(히라마쓰 요코 <한밤중에 잼을 졸이다> 중)
싱싱한 딸기일 필요도 없이 살짝 맛이 가서 뭉그러지기 시작한 딸기라도 좋다. 그 딸기들을 뜨거운 냄비 속에 넣고 달콤한 설탕과 함께 뭉근하게 졸여가는 잼. 히라마쓰 요코는 그 잼에 쿠앵트로 (오렌지 껍질로 만든 프랑스 리큐어)나 키르슈바서 (체리로 만든 증류주), 와인이나 향신료를 기분에 따라 조금 쓸 것을 권했는데, 나라면 하얀 소금을 한 꼬집 집어 넣겠다.
그렇게 밤사이 졸여진 붉은 딸기잼을 아침에 담백하고 짭짤한 크래커 위해 발라서 한 입 베어 문다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걸까?
쉽게 따서 바로 먹을 수 있는 생과일 상태로는 어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를 정성스레 더듬어 읽어 가는 일, 서로의 영혼과 육체의 실을 엮어 하나의 직물을 짜는 일이 어찌 생과일을 베어 무는 것처럼 가볍고 간단할 수 있을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