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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슴이 신기루가 되지 않으려면

단어에 발라 놓은 형광 페인트부터 벗겨야

by 윤소희

내 사전의 ‘오르가슴'이라는 단어에는 분명 어떤 환상이 있다. 환각제를 맞거나 마약을 했을 때처럼 소위 말해 ‘뿅’ 가는 상태가 되어야 오르가슴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렇게 번쩍번쩍하게 오르가슴을 정의하고 나면, 과연 나는 한 번이라도 오르가슴을 경험해 봤나, 하는 질문 앞에 머뭇거리게 된다.


여성의 오르가슴을 “떠 있거나 멈춰 버린 느낌”이라고 설명


믿기지 않는다. 막강하다. 가득 채워지는 느낌, 만족스럽다. 강렬하다. 신나고 흥미진진하다. 희열. 즐겁다. 고양감. 황홀하다. 사랑스럽다. 다정하다. 친밀하다. 격정적이다. 합일감. 느긋하고 편한 상태. 마음이 진정된다. 평화롭다. 무아경. 열광적이다. …


(신디 메스턴, 데이비드 버스 <여자가 섹스를 하는 237가지 이유> 중)


이 모든 반짝이는 형용사를 다 합한 것이 오르가슴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형용사가 다 오르가슴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모든 형용사를 버무린 '강력한 단 한 방'이라면 자신할 수 없지만, 오르가슴을 묘사하는 각각의 형용사들은 나 역시 사랑을 나누며 느껴보았기 때문이다. 오르가슴이라는 단어에 불필요하게 발라 놓은 번쩍번쩍한 형광 페인트가 나의 사랑을 초라하게 보이도록 만든 것은 아닌지.


나는 오르가슴이 오는 걸 볼 수 있다. 실제로 나는 오르가슴의 순간에 종종 눈을 크게 뜬다. 그러면, 맞은편 벽이나 천장이 보이는 게 아니라 환상적인 X선 투시가 이루어진다. 일이 잘 되었을 때는, 쾌감이 멀리에서 온다. 울퉁불퉁한 회색 내벽을 가진 기다란 관의 맨 안쪽으로부터 말이다. 쾌감이 입구로 번지면, 입구는 마치 물고기의 입처럼 뻐끔거린다. 다른 모든 근육은 느슨해져 있다. 쾌감의 물결은 여섯 번이나 일곱 번쯤 밀려온다. 대개의 경우, 나는 잠시 여운을 즐기며 손가락을 모아 음부를 살짝 문지른다. 그런 다음 손가락을 콧구멍 밑으로 가져가 달착지근한 향내를 맡는다.


(카트린 밀레 <카트린 M의 성생활> 중)

카트린 밀레

자신의 오르가슴을 당당히 묘사한 이 여자. 자신의 모든 감각을 열어 쾌락을 만끽하는 여인의 모습을 상상하며 섹시한 요부의 이미지를 떠올렸지만, 카트린 밀레는 몹시 지적인 여자다. 책 속에 하룻밤에 100명의 남자를 상대한 내용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녀는 미술잡지의 편집장이자 큐레이터다.


오르가슴에 대한 내 양면적인 태도가 발각되는 순간이다. 오르가슴에 도달하고 싶은 마음이 한쪽에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오르가슴을 맘껏 누리는 여자는 요부나 창녀, 마녀라며 세상과 함께 손가락질하고 있는 마음이 있다.


나는 오르가슴을 가장할 때마다 조금씩 죽어간다. 조금씩이라고? 아니, 그보다는 좀 더 빨리 죽고 있는 것 같다.


(파올로 코엘료 <불륜> 중)


한 손으로는 요부다, 창녀다, 손가락질하면서도 나 역시 강박관념에 오르가슴을 연기한 적은 없는지. '여자는 성녀 아니면 요부'라는 이분법. 그리고 내 안에 성녀와 요부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는 불합리한 강박관념.


무엇보다 자연스럽고 자유로워야 누릴 수 있는 오르가슴일 텐데,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하는 갖가지 틀로 옭아매느라 오르가슴은 점점 멀리 달아난다. 이러다 영영 도달할 수 없고 달아나버리기만 하는 신기루가 되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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