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신개념 깍두기의 탄생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먹는 일에 재미를...

by 윤소희

이젠 내 손으로 김치를 담그는 일은 없을 테다.


배추 한 포기로 김치 담그기에 평생 두 번 도전해 보았다. 처음에는 배추 절이는데 실패한 탓에 배추는 절여지지 않아 살아있었고, 김칫국물이라고 하기에는 맛도 빛깔도 이상한 물이 잔뜩 고인 ‘괴물 김치'가 되었다. 그 ‘괴물 김치' 한 포기를 먹어치우느라 남편이 무척 애를 먹었다.


그 아픈 기억으로 다시는 김치를 담그지 않으리라 했는데, 몇 년이 흘러 기억도 상처도 흐릿해지자 다시 한번 도전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실패 확률이 높기로 악명 높은 (물론 나한테만)' 절이는 과정을 과감히 생략할 수 있는 겉절이를 만들자. 그런데 이번에는 무슨 조화인지, 내 손의 실수인지, 나 몰래 언제 그렇게 소금이 들어갔던지. 짜도, 짜도, 너무 짰다. 유전으로 물려받은 고혈압 때문에 매일 혈압약을 먹는 남편에게 못할 짓을 한 셈이다.


이젠 절대로, 절대로 내 손으로 김치를 담그는 일은 없을 테다.


그즈음 한국에 들어갈 기회가 생겼다.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이국땅에 나와 산 지 어느덧 14년. 한국은 1년에 한두 번쯤 들어가 양가 부모님을 뵙는 게 고작이다. 친정에 짧게 머무르는 며칠 동안 엄마는 내가 평소에 먹어보지 못할 한국 음식들을 열심히 상에 올리셨다. 그 많은 산해진미 속에 내 입맛을 사로잡은 것은 깍두기. 깍두기는 원래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다. 웬만해서는 거의 손을 대지 않는다. 그런데 그때 엄마가 만든 깍두기에는 어쩐지 자꾸 손이 갔다.


“숟가락으로 국물까지 꼭 떠먹어라."

“김칫국물은 왜요?"

“거기 유산균이 듬뿍 들어있잖아."


조금은 독특한 먹는 법에 혹한 건지, 유산균이란 말에 혹한 건지. 호기심에 한 숟가락, 깍두기 한 조각과 함께 국물을 떠먹었다. 살짝 톡 쏘는 듯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시원하게 내려가며 혀끝에 감칠맛이 살짝 돈다. 맛있다. 엄마의 깍두기에 자꾸만 손이 간다. 결국 갈비찜이나 도미 요리 등을 제쳐두고, 깍두기와 함께 밥 한 그릇을 뚝딱 먹어치웠다.


“이건 진짜 쉬워!"


엄마가 전해준 레시피는 이랬다.

1. 무를 큼직하게 깍둑썰기를 한다. 미리 소금에 절일 필요도 없다.

2. 다진 마늘과 생강을 넣고, 원한다면 쪽파도 좀 썰어 넣는다.

3. 고춧가루는 색깔을 봐서 적당한 양으로 넣어주고, 엄마가 만들어 준 매실액과 새우젓으로 간을 하기만 하면 된다.

4. 끝.


“이 무 좀 깍둑썰기 해주세요. 이만한 크기로요."


나는 왼손 엄지손가락을 오른손으로 붙들어 ‘반’ 정도의 크기임을 강조했다. ‘아이'(阿姨: ‘아줌마’ ‘이모’의 뜻이나 가사도우미를 부를 때도 쓰임)는 “하오 더(好的:좋아요)”를 연발하며 활짝 웃었다. 베이징으로 이사와 인연을 맺게 된 ‘아이’, 다림질은 못하고, 빨래를 뒤집힌 채 그대로 개는 것과 네 식구의 옷과 양말을 여기저기 뒤섞어 숨겨 놓는 데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 우리 집 ‘아이’는 대신 하루 종일 활짝 잘 웃는다. 착하다. 그러면 됐지, 뭐. 프라이팬 바닥의 코팅이 전부 벗겨지고, 아침마다 보물찾기 하듯 이 방 저 방을 뒤지며 옷과 양말을 찾아야 하고, 갑자기 확 줄어든 옷이나 구겨진 옷을 발견하는 것쯤이야 뭐 대수인가.


활짝 잘 웃는, 착한 우리 ‘아이’와 나의 합작, ‘부스러기 깍두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신개념 깍두기 일명 '부스러기 깍두기'


내 엄지손가락을 너무 과소평가한 ‘아이’는 무를 잘게 다져 놓았고, 다져 달라고 내어 놓은 마늘은 무보다는 살짝 크게, 생강은 큼직하게 편으로 썰어 놓았다. ‘아이’는 활짝 웃었고, 나도 그런 ‘아이’의 웃음을 보며 활짝 웃었다.


‘아이’는 자칫 힘든 노동이 될 수 있던 나의 깍두기 담그기를 ‘킥킥’ 거리며 웃을 수 있는 일종의 유희로, 그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 활동으로 만들어 준 셈이다. 남편은 나의 부스러기 깍두기를 숟가락으로 떠먹을 때마다 ‘킥킥’ 웃었다. ‘아이’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먹는 일에 재미를 부여한 것이다.


멕시코에 살사(salsa)가 있다면, 한국에는 나의 ‘부스러기 깍두기’가 있다.

아니, 한중 합작품이라 해야 더 정확하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오르가슴이 신기루가 되지 않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