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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청을 피우는 아기의 능청스러운 표정이 그제야 보인다

흑백 사진 한 장을 들여다 보며

by 윤소희

컬러 사진으로도 부족해 각종 이미지 보정 효과를 더하는 포토샵이 일반화된 요즘, 여전히 흑백 사진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컬러 사진은 담고 있는 정보가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시선을 강하게 사로잡는 화려한 색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정보를 처리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색들이 전하는 감정적 영향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고 그저 색들에 홀릴 수밖에 없다. 반면 흑백 사진은 단순하고 극명하다. 정보량이 적어졌기 때문이다. 색에 홀리지 않고도 빛과 그림자에 집중할 수 있다. 흑백사진은 고요하지만 더 강력하게 가슴속을 더듬어 나간다. 내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게 해 준다.


내 앨범에는 백일 전으로 보이는 사진 두어 장이 흑백으로 남아 있다. 내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린 내가 웃고 있다. 햇빛에 눈이 부신지 눈썹을 살짝 찡그린 채.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는 카메라 렌즈를 외면한 채 아기에게만 시선을 주고 있다. 색채가 사라진 사진 한 장을 놓고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본다.


흑백.jpg 아기인 나를 안고 있는 엄마


곱게 화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던 처녀 시절 그녀는 온 데 간 데 없다. 옷장에는 더 이상 화려한 외출을 기다리는 세련된 옷도 없다. 대충 틀어 올린 머리에서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린다. 일하기 편한 티셔츠는 소매를 모두 걷어 올렸다. 흑백인데도 그녀가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이라는 걸 알 수 있다.


7년간 불같은 연애를 한 후 홀어머니의 반대로 결혼이 좌절되자, 그녀의 연인은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목숨을 걸고 허락을 얻어낸 결혼 직후 남편은 군으로 떠났다. 그는 상관의 눈치 아래, 그녀는 홀시어머니의 눈치 아래 서로를 절절이 그리며 신혼을 보냈을 것이다.


시어머니가 아들 면회를 간 날은 늦은 봄. 아들에게 선물처럼 남겨 놓고 온 그녀는 남편과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밤새 잠들지 못하고 서로를 아쉬워하는 뜨거운 밤이었을 것이다. 그 허름한 여관의 이름은 생뚱맞게 ‘부산 여관’이었다. 전방에 있는 부산 여관에서 애끓는 밤을 보내고 돌아온 그녀는 온몸에 이가 옮아 한참을 고생했다. 그 후 뱃속에 생긴 아기 때문에 입덧으로 한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예정일에 맞춰 그녀의 남편은 일주일 휴가를 받아 나왔지만 휴가가 끝나도록 아기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해 여러 번 뒤를 돌아보던 남편은 결국 아기가 태어나는 걸 보지 못하고 부대로 복귀했다. 예정일을 16일이나 넘긴 나른한 토요일 오후. 도대체 첫 손주는 언제 나오느냐며, 시어머니는 급기야 아기가 나올 문을 들여다보았다. 며느리가 어떻게 느끼든 상관도 않고. 바로 그 순간, 시원하게 터져 나온 양수. 시어머니는 머리에 양수를 홀딱 뒤집어썼다. 뱃속의 아기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 할머니에게 근사한 선물을 안겨 준 것이다. 왜 엄마에게 매운 시집살이를 시키느냐고 항의라도 하듯. 앞으로 손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미움받을 걸 알기라도 한 듯.


색이 사라진 사진 한 장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그녀의 미소가 이해된다. 그녀에게 안겨 딴청을 피우는 아기의 능청스러운 표정이 그제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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