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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Apr 22. 2020

달밤의 택시

삶 속에서 詩를 살아내는 사람들

달이 이미 둥그렇게 떠오른 밤, 택시를 탔다. 하루 종일 신나게 뛰놀았던 두 아이는 뒷좌석에 오르자마자 잠이 들었고, 그 옆에 앉은 나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강을 끼고 달리는 택시 안은 엔진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요하다. 


“강변을 따라 달리며 다리들 보는 게 제법 운치가 있어요." 

고요하던 택시 안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눈을 떠 보니 조용히 운전만 하던 백발의 기사님 목소리다. 잠시 창밖으로 한강 위의 다리를 무심코 바라보는데, 그때 조수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새벽 두 시쯤 혼자 운전하면서 이 길을 달리는데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는 거예요. 순간 가슴이 저릿했어요. 스쳐 지나가는 다리마다 저한테 말을 거는 것 같고. 다리들을 벗 삼아 달리는 길이 어쩐지 외롭지 않았어요" 

재클린 케네디가 즐겨 쓰던 클래식한 모자를 쓰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엄마의 목소리가 달빛처럼 부드럽고 쓸쓸하다. 혼자된 지 벌써 20년, 일흔이 넘었다고 말하면 그 누구도 믿지 않을 엄마는 20년 전 모습 그대로다. 20년이란 세월도 슬픔 가득한 엄마를 어쩌지 못했는지, 엄마는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채 세월만 흘려보낸 모양이다. 


"도심 한복판 빌딩 숲 속에서 보는 달하고 다리 위에서 보는 달은 다르죠. 빌딩 숲 사이로 보는 달은 뭐랄까,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요." 

다시 백발의 기사님이 입을 여는데, 부끄럽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수줍게 떨린다.  


달밤에 호젓한 강가에 나란히 앉아 나눌 법한 대화들이 택시 앞좌석에서 조곤조곤 들려온다.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아이들은 새근새근 잘도 잔다. 두 노인의 운치 있고 정감 어린 대화를 들으며, 나는 눈을 감은 채 부재를 가장한다. 


삶 속에서 詩를 살아내는 사람들. 한쪽 눈을 찡긋 뜨고 슬쩍 훔쳐본 차창 밖 다리 위에는 살짝 기운 달이 눈을 살포시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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