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희 Sep 01. 2020

기울어져 있다고, 삐딱한 시선으로 보지는 말았으면

<옷을 입었으나 갈 곳이 없다> - 이제

기울어진 채 인쇄된 문장들이 어쩐지 좋았다. 

앞표지에 있는 제목부터 뒤표지에 있는 isbn 넘버까지 

모두 조금씩 기울어져 있다. 


힘겹게 존재를 비끄러매고 버티는 모습이 애처로우면서도 어쩐지 그 기울어진 어깨에 기대고 싶어 진다. 

금방이라도 아래로 쏟아질 듯한 문장의 기울기가 채 나오지 못한,  

아니 곧 나오고 말 눈물 같다. 


기울어진 문장에는 

'똑바로 누우면 숨이 쉬어지지 않아, 항상 어딘가에 기대어 자’는 이들과 

'길거리에 흩어진 안녕이란 말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리고  

사랑했다는 말과 함께 추락’하는 이들이 기대고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확실히 알지 않으면 불안해서 그래요.


부디 기울어져 있다고,  

삐딱한 시선으로 보지는 말았으면... 


<옷을 입었으나 갈 곳이 없다> - 이제_기울어진 채 인쇄된 문장들이 좋다


설렘과 질투와 싸움과 소유로 이루어진 사랑은 여러 가지 색이 섞인 폭죽이 터지는 듯했다. 그런 사랑은 흔했지만 무색무취의 사랑은 처음이었다. 특징이 없어서 지워지지 않았고 눈에 띄지 않아서 변하지 않았다.


그 결과 조금은 평범한 딸이나 친구나 학생이 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자꾸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그 겨울은 쌓인 눈이 깊어서 앞사람의 발자국에 나의 발을 끼워 넣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거리를 두려고 해도 다시 사람을 따라가게 되는 모습이 나와 닮은 것도 같았다.


시간이 의미를 잃은 이곳
어김없이 찾아오는 낙조만이
묵은 것들을 훌훌 털어낸다.
죽은 것들을 붉게 안아준다.


도시 사람들은 눈앞에 광활한 대지와 살아있는 풀벌레를 두고도 동식물도감을 펼쳐 들었다. 그들은 살아 숨 쉬는 것보다 죽은 활자를 믿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든 소란(騷亂)은 소란(巢卵)이 될 테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