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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Sep 25. 2020

중국 격리 해제 전날, 날벼락

괴로운 2주를 따스하게 기억할 수 있게

2주 간의 중국 격리 해제 전날 밤. 

빨리 이 밤이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에 일찍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아이가 입을 연다. 


엄마, 내일 아침에 시험 보는데. 
응, 잘 봐. 
근데 종이가 없어.


온라인 수업 중에도 시험을 본다. 노트북 카메라를 켜 놓은 상태로 빈 종이에 답을 쓰고, 바로 사진으로 찍어서 제출하는 형태로. 최근 며칠 동안 몇 과목 시험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격리 13일 만에 종이와 연필이 떨어진 것이다. 


다급한 마음에 호텔 매니저에게 문자를 했다. 다행히 종이가 있으니 보내주겠다고 한다. 심지어 아침 배식 시간은 너무 늦으니 바로 갖다 주겠다고. 아이 시험은 아침 8시에 시작이다. 모든 물건 전달은 배식 시간에만 이뤄지는데, 아침 배식은 8시. 아슬아슬했는데, 특별히 배려해 준다니 고마웠다. 


호텔 매니저와의 위챗 대화 (제 짧은 문자에도 오타가 있군요 ^^;)


매니저가 더 필요한 게 없냐고 물었다. 아이들이 그제야 연필을 보여 주는데 도무지 더 이상 쓸 수 없는 상태다. 격리 시작할 때 빈 노트 몇 권과 잘 깎은 연필 10자루가 있었다. 격리 중 아이가 무료할 때마다 그림을 그리더니 노트는 빈틈이 없고, 연필은 다 닳아서 뭉툭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연필이 있는지 물었고, 매니저는 사다 주겠다고 말했다. 연필깎이가 없으니 새 연필은 소용없는데, 하는 생각을 읽었는지 우리 연필 사진을 보내달라고 한다. 뭉툭해져 못 쓰게 된 연필 사진을 본 그가 새 연필 두 자루와 작은 연필깎이를 사다 주었다. 심지어 돈도 받지 않고 선물로. 


호텔 매니저가 밤중에 올려 보내준 선물


아이가 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격리에 대한 추억을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이 고마웠다. 자칫 2주간의 격리가 괴로움으로만 기억될 수도 있었는데, 이제는 따스함으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2주간 격리는 힘들었지만, 칭다오에서 받은 당신의 따뜻한 마음을 기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엘리베이터로 물건을 전달해 준 호텔 매니저 때문에 알게 된 사실. 호텔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계단으로 낑낑대며 짐을 들고 온 게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를 모두 정지시켜 놓고 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잠가 우리가 탈출할 수 없게 했던 것이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밤에 불이 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상상만 해도 끔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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