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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Oct 21. 2020

등을 보이지 않으려다 곧 얼굴을 다 잃어버리겠다

<i에게> - 김소연 시집

사실 시 읽는 걸 참 어려워하던 사람이었다. 


에세이 집을 묶기 위해 함께 작업하고 있는 편집자가 시만 읽을 것을 주문했다. 아마도 메마른 내 정서에 물기를 더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얇은 시집을 잔뜩 주문해 놓고 왜 그리 한숨이 나오던지. 얇은 시집 한 권보다 두툼한 장편 소설 한 권을 읽는 것이 더 쉬운 시절이었다. 솔직히 시만 읽으라는 편집자의 말도 지키지 않고 있었다. 몰래몰래 다른 책들을 훨씬 더 많이 읽었으니. 시를 읽는 것이 왜 그리 어려운지, 시집을 읽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던 때도 있었다.  


그러던 내가 요즘 자꾸 시집을 찾아든다. 오히려 머리가 아플 때 시를 읽는다. 그것도 읽었던 시를 여러 번 반복해서. 


"우리는 서로의 뒤쪽에 있으려 한다 

등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은 아니고
다만 등을 보고 있으려고

표정은 숨기며
곁에는 있고 싶어서”


-김소연 ‘우리 바깥의 우리’ 중



요즘 내 모습이 꼭 그랬다. 

표정은 숨기며, 곁에는 있고 싶어서, 자꾸 뒤쪽에 있으려 하는. 



"그녀의 말과 그녀의 말 사이에
 
하지 못한 말이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과 함께

나뭇가지 끝에 매달리기 시작한다”


김소연 ‘우산’ 중



‘하지 못한 말’과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을 빼고 나면 남는 말이 없는 것 같은 요즘

그래서 더 시를 붙드는지도 모르겠다.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 대신 ‘하지 못한 말’을 끄집어내고 싶어서.



"분명히 맨 뒤에 서 있었는데
자꾸 맨 앞에 서 있다

우리는 등을 보이지 않으려다
곧 얼굴을 다 잃어버리겠다”


김소연 ‘우리 바깥의 우리’ 중


얼굴을 다 잃어버리기 전에 내 언어를 찾고 싶어서.



<i에게> - 김소연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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