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없애준다는 말의 허상
눈을 감으라는 간호사의 지시에 눈을 감는다. 숫자를 세거나 짧게 기도를 한다. 그 사이 두근거리던 가슴이 가라앉고 잠 속으로 빠져든다. 어쩐지 이 순간이 죽음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닮았다.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뭔가를 하고 있다는 의식이 점점 사라져 소실되어가는 것이.
위나 대장 내시경을 하는 걸 달가워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진정 내시경의 경우 불안감과 두려움, 불쾌감과 구토 때문에 힘들고 진정 내시경의 경우에는 혹시 영영 깨어나지 않는 게 아닐까,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닐까 두렵다.
진정 내시경을 하기 위해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고 침대에 옆으로 누웠다. 침을 삼키면 사레들린다는 말에 침을 삼키지 않으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침이 더 고이고 나도 모르게 삼키게 된다. 처음 하는 게 아님에도 두렵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다. 숫자 열을 세기도 전에 나는 의식을 잃을 테니까. 진정제를 투여하고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가물가물 의식이 사라져 가는 그 시간에 나는 늘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으로 건너가는 길이 이 길과 닮았을 거라는 생각을.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몽롱한 상태로 일어나 주섬주섬 휴대폰과 안경 등 소지품을 챙긴다. 시간을 확인하니 40분 정도 훌쩍 지났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 삶의 40분이라는 시간이 뭉툭 잘려나간 것이다.
내시경을 할 때 투여되는 미다졸람이나 프로포폴 같은 진정제는 마취제가 아니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내시경을 받는 동안 내 통증을 줄여주기 위한 약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기억을 지워준다. 불안하고 두렵고, 불쾌하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지워주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어쩐지 고약하다. 내 고통을 줄여주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기억만을 뭉툭 잘라가면서 평온을 가장해 인심 쓰는 듯해 괘씸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누구를 비난할 수 있을까.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긴 동의서에 사인을 한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인데.
여전히 깨어날 때 기분은 별로지만, 진정제 투입이 시작되고 가물가물 의식이 사라지는 그 시간을 좋아한다. 죽음을 위한 예행연습 같아서. 진정제가 내게 주는 건 ‘가짜’ 평온이지만, 진짜 죽음을 맞이할 때는 ‘진짜’ 지극한 평강을 누리며 눈을 감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련과 후회를 줄여나가야 할 텐데, 미다졸람이나 프로포폴처럼 기억을 깨끗이 지우고 '마치 다 해결된 척'하는 위장은 싫다. 결국 진정제 없이 고통을 내 몫으로 오롯이 견뎌내야 한다는 것.
내시경은 진정 내시경, 죽음은 비진정 죽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