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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May 01. 2021

하양도 까망도 아니어도 되는 시간, 나의 새벽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살아본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고독과 고통

알람이 없어도 몸은 기억하고 있어, ‘늦은 끝과 이른 시작의 중간. 밤과 아침의 말랑말랑한 교집합*’의 시간이 되면, 나도 모르게 눈이 떠진다. 그때만이 유일하게 내가 속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걸 내 몸도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눈이 떠졌다고 몸을 일으킬 수 있는 것도, 그 시간을 내 것으로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약 복용을 시작한 지 3주째. 잠을 많이 자야 한다는 의사의 말이 그대로 약 속에 담겼는지, 약을 먹으면 잠이 쏟아진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오롯이 내 것인 줄 알았던 시간을 결국 포기했다.  


며칠 전에는 아이가 생일 선물로 받은 시계로 스트레스를 측정할 수 있다며 내 손목에 시계를 채워 주었다. 시계는 빨간색을 보이며 ‘High’라는 글자를 깜박였다. 측정 전에 스트레스받을 만한 일이 전혀 없었는데도 그랬다. 혼자 있는 아이를 위해 같이 카드 게임을 해주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자려고 침대에 누울 때마다 어쩐지 내가 힘을 다 빼지 못하고 힘을 준 채 잠들려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게 떠올랐다.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이 아닌 평상시에도 늘 긴장한 채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이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고 저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경계에 서 있다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나를 늘 사로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양인 척, 까망인 척, 그럼에도 하양도 까망도 아닌 채 살아가다 보니 힘을 뺄 수 없었나 보다. 문득 언젠가 보았던 영화 <그린 북 (Green Book)> 에서 비를 맞으며 울부짖던 주인공의 대사가 떠올랐다. 


“So If I’m not black enough, I’m not white enough, then tell me Tony, what am I?"


영화 <그린북> 중


그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살아본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고독과 고통. 그냥 다 같이 어우러져 살면 좋을 텐데, 금을 긋고 편을 나누는 것은 또 왜 그리 쉬운지. 


하양도 까망도 아니어도 되는 시간, 나의 새벽. 

해가 뜨기 전 그 고요한 경계에 서서 숨을 돌리며 평온을 누리던 때가 그립다. 

그 짧은 시간만이 내가 유일하게 힘을 빼고 오롯한 나로 존재할 수 있던 시간이기에. 



*"새벽 세 시, 더없이 애매한 시간. 

늦은 끝과 이른 시작의 중간. 밤과 아침의 말랑말랑한 교집합. 그 시간에는 추함과 아름다움의 구분이, 옳고 그름의 차이가 무의미해진다. 모든 각자가 먼지처럼 정체성을 잃고 무목적의 행렬에 뒤섞여 장엄하게 유보되는 시간. 그리고 사과의 시간."

(박형서 <당신의 오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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