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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Apr 28. 2021

어쩌면 우리는 이식되어 심긴 외톨이나무들일지도

소설 <오버스토리>를 읽던 중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그 아기를 위해 나무 한 그루를 골라 심는 가족의 이야기에 유독 마음이 갔다. 리의 느릅나무, 진의 물푸레나무, 에밋의 아이언우드, 애덤의 단풍나무 그리고 아기 찰스의 검은호두나무. 아이마다 ‘내 나무’라고 부를 수 있는 동갑내기 나무가 있고, 언제든 돌아오면 그 나무 곁에 기댈 수 있다니. 참 멋진 일이다. 아이들은 이미 늦었으니 나중에 손주라도 생기면 그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무를 골라 정성껏 심어주어야지. 


생각만 해도 든든하고 푸근하다 싶었는데, 문득 현실적인 문제가 떠올랐다. 나무를 심을 땅이 없다. 시골에 나무 몇 그루 심을 땅뙈기 정도 살 수 있다 해도 단순히 경제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무를 심는다는 건 어디에 뿌리를 내릴 것인가, 어디에 정착하고 싶은가, 하는 질문에 먼저 답을 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담양을 여행할 때 만났던 고목들


한 군데 정착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진저리를 치던 시절이 있었다. 틈만 나면 여행을 하고, 이사도 많이 다니며 정착민보다는 유목민의 생활을 동경하며 그렇게 살아왔다. 어느 날 문득 나무에 눈길이 가기 시작하면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삶에 대한 관심과 동경이 싹트기 시작했다. 


자연적으로 조성된 숲의 일원인 나무들은 뿌리로 서로 연결되어 소통하고 약한 이웃을 도우며 살아간다고 한다. 하지만 도시의 나무들은 공원에 심긴 나무든 가로수든 인공적으로 이식된 나무들이라, 뿌리가 손상되어 그런 네트워크를 조성하기 힘들다. 말하자면 인공으로 심긴 나무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함께 심겼다 해도 모두 외톨이인 셈이다. 뿌리를 땅에 내리고 있음에도 뿌리로 서로 연결되지 못해 홀로 살아가야 하는 외톨이. 


그러고 보니 도시의 나무들이 내 삶을 꼭 닮았다. 외톨이.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떠도는 삶이 분명 매력 있었지만, ‘외로움’이 주된 정서가 되는 걸 피할 수는 없다. 더구나 늘 내 맘대로 떠날 수 있고, 원하는 곳에 가 머물 수 있다는 믿음마저 실은 허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커가면서 외로움은 더 깊어졌다.  


잠시 머물다 떠날 곳이라 여겼던 곳에 7년 넘게 머물고 있다. 언제부터였는지 내가 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을 맘대로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내게 없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떠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떠내려 오거나 흘러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정도로. 어쩌면 처음부터 선택권이 내게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쯤 되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어딘가로 실려와 이식되어 심긴 나무와 나는 쌍둥이처럼 닮았다. 


연결이 끊긴 나무. 이식되어 심긴 나무는 물과 영양을 아무리 많이 공급해도 자연적으로 조성된 숲에 있는 나무처럼 튼튼하게 자라지도, 오래 살지도 못한다. 거리의 아이들이나 버려진 고아들처럼 그저 힘겹게 생존을 할 뿐이다.  


문득 뿌리를 찾아 연결되고 싶다는 생각에 두리번거려 보지만, 부모와 형제들은 모두 멀리멀리 뿔뿔이 흩어져 있다. 여러 이유로 지금은 남편과도 떨어져 있고, 몇 년 안에 아이들도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나갈 것이다.  


맑은 날에는 차를 타는 대신 일부러 걷는다. 그리고 아파트 단지나 길가에 심긴 나무줄기나 가지에 살그머니 손을 갖다 댄다. 너와 나는 어쩌다 여기 옮겨져 심긴 외톨이 나무지만, 우리끼리라도 서로 연결되어 보자 하는 마음으로. 한 번 안아보고 싶을 만큼 두툼한 줄기의 고목은 만날 수 없지만, 앙상하게 마른나무 줄기를 오래도록 어루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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