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 이승희 시집
엄지손톱에 금이 갔다. 몇 번째인지 세는 것도 이미 포기한 지 오래. 젤 네일이 손톱 건강에 치명적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네일숍을 찾는다. 안 그래도 손톱이 약한 편이었는데, 지난 몇 년 네일 케어를 받으며 손톱이 종잇장처럼 얇아졌다. 손톱을 쉬게 해 주겠다고 한동안 네일숍 방문을 끊었지만, 결국 3주를 넘기지 못했다. 젤 네일로 딱딱하게 덮어놓지 않은 손톱은 금세 갈라지고 찢어져 도무지 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악순환인 줄 알면서도 다시 찾게 되는 아이러니.
몇 달 동안 친절하게 내 손톱을 관리해 주던 네일 아티스트가 고향에 간다고 떠난 이후 아직 마음 붙일 사람을 찾지 못했다. 이 바닥 생리를 잘 모르지만, 한 곳에서 오래 일하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예약할 때 아무나 관계없다고 했더니, 경험이 얼마 없는 이를 배정해 주었다. 젤 네일을 제거하는데 열 손톱 모두 불이 나는 듯 뜨겁고 아프다. 그가 갈아내고 있는 건 오래된 젤이 아니라 안 그래도 얇아진 내 손톱이었을 것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 얼얼한 손톱을 문지르며 어릴 적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이던 밤을 떠올렸다. 실로 칭칭 감은 답답한 손가락으로 긴 밤을 버텨야 했지만, 지금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꽃과 몸 섞는 일이란다. 밤새 너는 꽃의 방랑기로 온몸이 붉어질지도 몰라. 꽃이 피는 소리를 들으려면 네 몸을 꽃에 명주실로 꽁꽁 싸매야지.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바람 냄새가 온몸 가득 스며드는 그런 꿈이란다. 담장 아래에서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리던 기억과 공중에서만 피는 꽃의 일기장을 흐린 불빛 아래에서 펼쳐보는 일이란다. 꿈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라고, 어둔 흙 속을 뜨겁게 열어온 꽃의 내력을 품는 일. 그네를 타거나 기차를 타고 꽃 속으로 오래오래 들어가보는 일."
이승희 ‘봉숭아 물들다 - 솔에게 2’ 중
컬러를 맘대로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림을 그려 넣거나 스톤을 박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봉숭아 물을 들이는 밤마다 얼마나 설렜던가. 봉숭아 물을 들이는 건 단순히 손톱에 색을 입히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꽃과 사랑을 나누는 일이고, 꽃의 과거를 훔쳐보며 내 안에 품는 일이었다. 꽃이 흘린 시큼한 피 냄새를 맡으며 밤새 열 손가락을 명주실로 칭칭 감고 자면, 손가락에 꽃이 피었다. 꽃이 흘린 피처럼 붉은 꽃이.
"그리고 네 손톱에 자라는 흰 달이 다시 널 마중 나올 때까지 행복할 거야."
이승희 ‘봉숭아 물들다 - 솔에게 2’ 중
손톱이 자라며 붉게 물든 부분이 줄어가는 것이 어찌나 아쉽던지. 첫눈 올 때까지 붉게 물든 손톱이 남아있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첫사랑이 이뤄진다고 믿었거나 그걸 바랐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손톱에 핀 꽃이 지는 게 아쉬웠을 뿐이다.
봉숭아 물을 들이는 대신 네일숍에서 손톱에 수많은 색깔을 입힐 수 있게 되었지만, 손톱에 피는 꽃은 다시 볼 수 없다. 꽃과 사랑을 나누지 못해 손톱이 시름시름 앓으며 종잇장처럼 얇아지고 있는 건지 모른다.
사랑을 하는 건 분명 아프다. 하지만 사랑 없이 사는 건 봉숭아 물 대신 젤 네일을 올린 손톱처럼 점점 약해지고 얇아지는 일이다. 자기가 아픈 줄도 모르고 서서히 갈라지고 찢어진다. 첫사랑을 찾듯 봉숭아 꽃을 찾아 길을 나서야 할까. 하지만 마치 첫사랑이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듯, 봉숭아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다. 아니 봉숭아를 찾는다 해도 다 부서진 손톱으로 다시 몸을 섞고 사랑을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