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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Oct 10. 2021

기쁨을 구체적이고 뾰족하게 만들어 꽉 쥐어 두세요

모호한 미래의 걱정 덩어리가 지금의 기쁨을 망치려 할 때

서로의 아내나 남편 대신 그저 페북 친구가 되려는 걸까. 남편과 나는 한동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정 떼기 모드'에 들어갔다. 이제 그가 떠날 날이 3주도 남지 않았다. 누군가는 ‘뭐야, 아직 많이 남았잖아’라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이제 이 나이쯤 되면 남편이 좀 떨어져 주는 게 더 좋지 않아요?’라고 물었다. 수도 없이 마주치는 반응임에도 아직도 이에 대꾸할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 ‘부부란 무엇인가’부터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며칠 전에는 남편이 갑자기 부르더니 예적금 계좌와 투자 내역을 정리한 파일을 보여주었다. 돈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도록 집안의 재정은 늘 남편이 관리하고 책임져 왔다. 얼마 전 가까운 가족을 잃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장례에 가 보지도 못했다. 허망한 이별을 겪으면서, 예기치 못한 불행 후 남겨진 자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파일을 제대로 들여다 보기는커녕 울컥 눈물이 쏟아져 얼른 그 자리를 피했다. 마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이가 유언장을 전하는 장면 같아서. 


그냥 같이 살면 안 되냐고 어린아이처럼 조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란 걸 안다. 내 눈물 보는 걸 무엇보다 싫어하는 남편은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자리를 피할 것이다. 나는 그가 떠난다는 생각의 ‘떠’ 자를 떠올리기도 전에 벌써 눈물이 나는데, 남편은 내 눈물을 자기 힘으로 막을 수 없을 때의 그 무력감을 몹시 싫어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마치 작정하고 정을 떼겠다는 듯이. 


그렇게 한동안 찬바람을 일으키며 서로를 피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오늘을 오롯이 살지 못하고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을 끌어와 오늘을 망치는 걸까. 그가 떠난 후 얼마나 슬플지, 외로울지, 그가 그리울지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짐작은 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떨지는 절대 미리 알 수 없다. 디테일이 빠진 그저 모호한 걱정의 덩어리일 뿐이라, 불분명하기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크기만 점점 부풀려진다. 점점 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가는 것이다. 작은 눈송이가 굴려져 어마어마한 눈사태를 일으키듯, 미래에 대한 걱정의 씨앗이 부풀고 부풀어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는 구체적인 기쁨을 뭉개버리고 있었다. 


모호한 미래의 덩어리를 밀쳐 내고, 작지만 단단한 것들을 손에 쥐기 시작한다. 긴장을 풀고 웃을 때만 볼 수 있는 그의 볼에 팬 작은 보조개를 기억에 담아 둔다. 이불 대신 그의 품에 파고들며 온기를 피부에 저장해 본다. 겨울에 난방이 형편없어 한 몸이 되지 않고는 잠들 수 없던 황푸강 옆 신혼집을 함께 떠올리며 미소 짓기도 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몇 번 안 남은 끼니들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가 좋아하는 음식을 조금씩 건강하게 나눠 먹는다. 혼자 남아도 대충 때우지 않고 매 끼니를 함께 하듯 건강하게 먹을 수 있도록. 혼자서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몹시 흔들리는 내 ‘미’를 그의 흔들림 없이 견고한 ‘도’ 위에 살짝 얹어 하모니를 맞춰 보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을 더욱 구체적이고 뾰족하게 만들어 꽉 쥐어두는 일은 언제나 도움이 된다. 형체도 없이 모호한 미래의 안개가 뿌옇게 시야를 가리며 ‘지금 여기’의 행복을 망쳐버리려 할 때는 특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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