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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Oct 13. 2021

예쁘고 말랑말랑한 솜사탕도, 작고 단단한 약과도 사랑

나이가 들며 달라지는 사랑의 맛과 빛깔

예쁘고 말랑말랑한 사랑 이야기를 읽었다. 걸쭉하고 쌉쌀한 초콜릿 퍼지가 아닌, 알록달록한 알사탕이나 하얀 마시멜로우, 아직 그 누구도 손을 대기 전의 솜사탕 같은. 어쩌면 이제 나는 결코 쓸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보송보송한. 


너무 많은 사랑 이야기를 읽고 또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눈에 뭐가 씌어 홀린 듯 사랑에 빠진 연인이 아무런 갈등과 어려움 없이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는 없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그런 이야기가 있다 해도 그 누구도 읽지 않을 테지만. 반짝이고 몽글몽글한 사랑을 보며 함께 설레고 두근두근하면 좋을 텐데, 수많은 사랑 이야기의 패턴을 알아버린 나는 벌써 다음에 등장할 갈등과 배신, 그리고 적수를 떠올린다. 


어쩌면 그래서 나이가 들면 ‘망각’을 선물로 받는 건지도. 이미 알아버린 이야기의 패턴 같은 건 잊으라고. 마치 생전 처음 사랑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사랑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다시 설레라고. 


물론 냉장고 문을 열다 한참 동안 찾던 휴대폰을 발견하는 그런 종류의 ‘서프라이즈’는 싫지만, 이제는 그만 좀 잊고 싶다. 콩깍지가 벗겨졌을 때의 실망감과 책임 없이 던진 약속이 산산이 부서졌을 때 느낀 허망함 같은 것. 자기 눈이라도 뽑아줄 듯 사랑한다더니 다음날 내 눈알을 뽑으려고 달려드는 살기나 추하고 어두운 건 말하지 말라며 밀어내던 연인의 냉정한 등도. 


어쩌면 '얼룩진 과거로 망쳐버린 오늘'이란 '영원히 짜기만 한 찌개'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오늘 찌개가 좀 짜네, 그럼 물을 더 붓거나 두부를 잔뜩 썰어 넣으면 되지 않을까.  


물론 퍽퍽하고 맛없는 빵 위에 아이싱과 데코로 덕지덕지 장식해 겉모습만 그럴듯한 케이크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파스텔 톤의 구름 같은 솜사탕은 막상 혀를 대보면 그냥 설탕 맛이고, 색소 때문에 혓바닥만 물들지 모른다. 알콩달콩 아기자기해 보이는 누군가의 사랑을 흉내내기보다는 작고 소박하지만 내가 아끼는 것들을 주워 모으는 편이 나을 것이다. 잠들어 있는 내 이마에 살짝 입술을 갖다 대는 남편의 온기나 주름진 눈으로 온화하게 웃는 미소 같은 것. 볼품은 좀 없어도 탱글탱글한 알밤처럼 작고 단단한 것들을 하나씩 주워 모은다. 


남은 삶, 오감을 자극하는 화려한 디저트는 아닐지라도 늦은 오후 따뜻한 차와 함께 허기를 달래줄 약과처럼 든든한 사랑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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