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고 깨질 수 있음에도 글을 쓰는 이유
자기를 드러내는 일은 돌을 든 사람들 앞에 벌거벗은 채 나서는 것과 같을지 모른다. 언제든 상처 받을 수 있고 깨질 수 있다. 안전이나 안정과는 거리가 멀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신을 설명해보라고 하면 한 줄 문장을 끄집어내기 어렵다. 남이 쓴 문장을 보고 ‘맞다, 틀리다, 좋다, 나쁘다’ 평하는 건 쉽지만. 다양한 스타일의 옷이 걸려 있는 옷가게에 들어가 자신에게 잘 어울리고 또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망설임 없이 고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점원이 이것저것 골라 가져오면, ‘이건 별로네, 이건 괜찮네’하고 평을 하는 건 쉽지만. 어쩌면 많은 이들이 남이 쓴 글을 훔쳐보며 자신을 표현할 딱 맞는 문장을 찾고 있는 건지 모른다. 스스로 잘 표현할 자신은 없으니까.
굳이 나를 표현해야 하나. 나를 잘 표현한 맞춤한 문장을 찾는 일이 왜 중요할까. 모호하고 두루뭉술한 것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괴롭히기 때문이다. 성폭력이나 전쟁을 겪은 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환자들에 대한 연구를 보면, 환자들은 자신을 수렁에 빠뜨린 사건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심지어 기억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때 그 사건을 최대한 상세히 설명하고 그 영향을 말로 표현해 낼 수 있게 되면, 비로소 그 끔찍한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존재하지 않던 말을 찾고 나면, 거기서 회복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무리 깊은 상처를 입었다 해도 말을 찾으면 그때의 감정을 끄집어내고 나눌 수 있다. 우선은 자기 자신과 그리고 나를 아끼는 다른 누군가와도. 실제를 설명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에서 헤어 나오기는 쉽지 않지만,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에서 빠져나오는 건 가능하다.
기쁨이나 행복 역시 마찬가지다. 모호한 덩어리일 때보다 손에 잡힐 정도로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쁨은 배가 된다. 그냥 차를 좋아한다고 할 때보다 아쌈 계열 홍차를 밀크팬에 우유와 함께 넣고 진하게 우린 후 설탕은 절대 넣지 않은 밀크티를 좋아한다고, 봄에 난 전홍(滇紅) 햇차의 황금색 빛 싸라기 같은 찻잎에 더운물을 붓는 순간 폭발하듯 퍼져 나오는 향기를 좋아한다고 할 때 행복은 훨씬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너른 우주와 비교할 때 먼지보다 작은 존재라고도 하지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이기도 한 나. 그냥 사람이야, 하는 부연 안갯속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찾아줘야 하지 않을까. 미세한 자극에도 자주 파르르 깜빡이는 눈꺼풀, 조금 짧고 뭉툭한 손가락에 종잇장처럼 얇고 잘 부서지는 손톱, 햇빛에 노출될 때마다 작은 깨알 같은 점을 만들어 별처럼 뿌리는 피부… 새벽에 혼자 눈을 떴을 때 가장 명징 해지는 머리와 사람 많은 곳에서 급속히 방전되는 배터리 등.
나 자신과 내가 좋아하는 것, 나를 슬프게 하고 괴롭게 한 일,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관…흐리멍덩하고 두루뭉술한 덩어리를 정교하게 조각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 갑자기 터뜨렸던 분노와 무력하게 포기한 후 느꼈던 절망 뒤에 숨은 이유를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무딘 칼 밖에 쥐지 못한 대부분의 우리는 덩어리를 뾰족하게 만드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결국 마트에서 시식 코너에 놓인 것들을 맛본 후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 장바구니에 담듯,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이미 섬세하게 조각해 놓은 구체적인 문장과 그림, 음악을 열심히 자기 바구니에 담는다. 그리고 이리저리 돌려 보며, 내게 맞도록 조금 더 다듬는다.
조금 더 정교해지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도울 수 있다. 누군가 이미 세밀하게 깎아 놓은 문장을 열심히 읽으며 맞춤한 것을 내 바구니에 담는다. 그리고 누군가가 바구니에 담아 갈 수 있도록 여전히 거칠지만 조금 더 뾰족해진 것들을 부끄럽지만 내어 놓는다. 때로는 깨지고 흠이 나기도 하겠지만, 뭉툭한 덩어리를 그대로 두기보다는 조금씩 세공해 나가며 나만의 보석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