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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Oct 12. 2021

아이가 아플 때 엄마의 시간은 쓱싹쓱싹 지워진다

'결석'이 아니라 갑자기 생긴 '공강'처럼 시간을 선물로 받은 거야

아이가 아플 때 엄마의 시간은 쓱싹쓱싹 지워진다. 아침 식탁에 얼굴을 찡그린 채 구부정한 자세로 느릿느릿 나타나는 아이를 보면 순간 긴장한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들이 폭죽처럼 터지지만 판단을 유보한 채 아이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마침내 아이의 입에서 배도 아프고, 머리도, 목도, 코도, 귀도 아프다는 말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난다. 걱정이 안 되어서가 아니라, 허약한 아이를 둔 엄마의 체념 같은 것일지 모른다. 며칠째 입 안이 다 헐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도 병원에 가기를 한없이 미루던 나지만, 아이가 아프다니 바로 병원 예약을 했다. 그리고 네 개의 스케줄을 모두 취소했다. 수업 시간에 칠판에 빼곡히 적어 놓았던 글씨를 쉬는 시간에 지우개로 지우듯, 그렇게 내 시간을 쓱쓱 지웠다. 


병원에 다녀오고 나니 아이도 나도 절인 배추처럼 축 늘어졌다. 늘 냉동실에 상비해두는 누룽지를 끓여 아이에게 점심을 먹이고 약을 챙겨 먹였다. 푹 자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아이의 잠자리를 봐주고 돌아 나오는데, 몸이 으슬으슬하고 머리가 띵하다. 얼었다 녹았다 다시 얼었다 녹는 일을 반복한 고기처럼 몸이 상해 가는 모양이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아픈 건 아이인데, 내 몸은 왜 불이 꺼지는 걸까. 학교를 못 간 건 아이인데, 왜 내 하루가 결석 처리되는 걸까. 


이른 저녁 숙제를 해보겠다고 잠시 앉았던 아이가 견디지 못하고 침대에 다시 무너졌다. 이불을 끌어올려 목 주위까지 꼼꼼히 여며준 뒤 머리를 쓰다듬고 기도를 해주었다. 숙제 못 해도 괜찮다고, 몸이 회복되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말과 함께. 어쩌면 그 말은 내가 듣고 싶던 말이었을 지도. 아이 방 불을 꺼주고 아이 핑계를 대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하루 종일 한 일은 쓰러져 잔 일밖에 없지만, ‘결석’이 아니라 어느 날 좋은 날 갑자기 생긴 ‘공강’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내 시간이 지워진 게 아니라, 쉬는 시간을 선물로 받은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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