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 페터 빅셀
르네 마그리트 전시회에 가서 <이미지의 반역>을 다시 보니, 자연스레 <책상은 책상이다>가 떠올랐다.
아마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을 거다.
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를 읽고 충격을 받았던 것이.
상당히 고지식하고 딱딱한 세계관을 형성해 가던 나는
그 책 덕분에 책상을 꼭 책상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하며 세상을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는 시선을 얻었다.
요즘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이 아주 많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바쁘고 분주하며 늘 시간이 없어 쫓기듯 살아간다'
세상이 한 목소리로 외치는 ‘효율’ ‘목표 달성’이란 기준.
난 여전히
목적이 없어 보이는 삶,
효율성과는 거리가 없어 보이는 삶을 잘 견디지 못하고 있다.
행복은 어쩌면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에, 무용한 것들에 있는 건지도 모르는데.
이젠 정말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다.
시간에 ‘눌리지’ 않고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어른이.
어쩌면 ‘듣기’란 ‘이해하기’보다 훨씬 단계가 높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대단찮은 청중일 것이다. 언제나 성급하게 이해하려고 하니까.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들을 수 있다.
독일어 선생님에게 발저를 알고 있는지 질문한 것은 지독한 실수였다. 선생님은 발저를 몰랐고, 나를 안 좋게 생각했다. 몰라도 되는 것을 유식한 사람에게 질문한 나는 무식한 사람이 되었다.
“그 여자에게 어떻게 그런 고통을 줄 수 있어요? 흥정을 했어야죠. 그 책은 그녀의 것이었어요. 그런데 돈이 필요해서 자기 소유물과 헤어져야 한 거예요. 그 여자에게는 작별을 끌고 늦출 권리가 있었다고요. 그렇게 빨리 흥정을 끝내다니, 당신은 그녀를 모욕한 거예요.”
… 흥정이 가격뿐 아니라 생동감, 교제 및 대화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스위스 사람인 내가 어찌 알았으랴.
효율만을 목표로 삼는 사회의 문제다. 효율은 결국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이 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