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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an 27. 2022

가까이서 쓰러뜨리는 사람 vs. 멀리서 일으키는 사람

여백을 채우는 사랑 그리고 인연

가까이 있어도 불편하고 내 에너지를 뺏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멀리서 얼굴 한 번 보지 못해도 나를 일으키고 토닥이는 인연이 있다. 


책을 처음 출간했을 때,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작가를 팬이라고 자처하며 따라 주었던 그녀. 그녀와 인연이 된 지 어느덧 5년이 되어 간다. 그녀는 내 블로그의 썰렁한 댓글 창에 길고 다정한 댓글을 남겨 주고, 인스타 정규 라방을 꼬박꼬박 챙겨 듣고, 내가 위챗 모멘트에 올린 광고를 보고 친구와 함께 성경 수업을 듣고 고맙다는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 주는 사람이다.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반가운 편지를 받듯, 그녀가 올린 인스타 피드를 보았다. 작년에 출간된 <여백을 채우는 사랑>을 소개하는 따뜻한 문장을 읽다 보니 그 책을 쓰던 시간이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펜데믹 상황으로 소란스럽던 세상 속에서 작은 공간에 나를 가둔 채 글을 빌려 마음을 붙들기 위해 애쓰던 시간. 말을 줄이고 문장에 쓰인 단어를 줄이고 또 줄이며, 긴 침묵과 여백을 담고 싶던 그 시간.  


@jinhui_garden 님이 인스타에 올린 피드


그때의 마음을 까맣게 잊고 한동안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아직 드러내지 않은 나, 내 ‘여백’까지 알아보고 읽어주는 독자가 있는데도 글을 쓰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으니. 쓰이지 않은 ‘여백’마저 읽어내는 독자는 잊은 채, 내 글 한 줄 읽지 않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던 시간을 지우고 싶다. 


사실 마음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라, 별것도 아닌 말 한마디에 그대로 주저앉기도 한다. 그런 말을 던진 사람 대부분은 내 삶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심지어 잘 알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그런 이가 무심코 던진 말에 엄청난 무게를 실어 주고는 얻어맞고 쓰러지곤 했던 것이다. 심지어 오래도록 곱씹으며 악한 말이 내 영혼을 갉아먹게 내버려 둔 적도 많았다.  


그런가 하면 따스하게 건네는 말은 곧이곧대로 듣지 못하고, 물건 값도 못 깎으면서 칭찬은 어찌 그리 잘 깎아내렸던지. 그건 일종의 보호막이었는지 모른다. 혹시나 믿고 아꼈던 이가 나를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지레 겁먹고 밀어내는 비뚤어진 보호막. 버림받아본 사람들이 갖는 특이 하달 것도 없는 못난 방어기제. 


그녀가 내 귀에 속삭이듯 전해준 다정한 말을 붙들고 왜곡된 마음의 저울을 고쳐볼 용기가 생겼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이의 험담에 달려 있던 추를 떼어내고, 나를 아끼는 이가 건네는 말 한마디 한 마디마다 그 추를 공들여 달아 줄 것이다. 말 한마디, 아니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한 사람을 기억하며 넘어졌다가도 금세 몸을 일으킬 것이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말을 줄이고 더 아끼며 여백을 늘리면서. 


기울어진 저울 위에서 보는 풍경은 몹시 다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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