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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되어서 나를 잃기보다는 더욱 나 자신이 되길

<돌봄과 작업> - 정서경 외

by 윤소희


"나를 잃지 않고 엄마가 되려는 여자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글을 쓴 지 11년이 넘었다. 그 덕분에 에세이 몇 권을 출간하고 작가가 되었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가장 많은 질문을 받는 것 역시 '새벽 3시 기상'에 관한 것이다. 원래 아침형 인간이 아니었던 내가 새벽 기상을 하게 된 데는 대단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었다. 당시 두세 살이던 두 아들을 키우느라 낮에는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없었기에, 애들보다 두 시간만 먼저 일어나자고 결심했던 일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토니 모리슨도 그랬다. 처음 글을 쓰던 시절 두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방해받지 않고 글을 쓰려면 새벽 4시에 쓸 수밖에 없었다고. 이 습관이 후일 혼자 살게 되었을 때도 지속되었고, 새벽 해뜨기 전이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공격 대상이 나타났을 때 인간은 '투쟁' 또는 '도피' 반응을 나타낸다고 배웠지만, 그건 남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반응이었다. 여자들은 도망가지도 싸우지도 않는다. 아이와 환자, 노인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그 자리를 쭉 지켜 나간다. 어떤 상황에서도 '돌봄'을 우선시한다.


'돌봄'을 손에 쥐고 그동안 '작업'을 포기하거나 놓았던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아이를 돌보는 일과 내 것을 만드는 일 사이에서 시도하고 실패하고 그럼에도 성장하는 11명의 여자들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돌봄과 작업은 무관해 보이지만, 둘 다 우리 삶에서 중요하고 또 창조적인 영역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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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과 작업> - 정서경 외


1) 정서경: 시나리오 작가 (영화 <헤어질 결심> 등)


"진짜가 아닌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다"


돌아보면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중요하지 않은 시나리오는 쓰고 싶지 않았다. 진짜 사랑이 아닌 것은 쓰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게 없으면 사람은 죽으니까.
...
그렇게 <아가씨>와 다른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나는 '엄마'라는 사람이 되었다.



2) 서유미: 소설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일"


열 살 된 아이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그 속에 좀 더 어린아이, 그보다 더 어린아이가 들어 있을 것 같다




3) 홍한별: 번역가


"아이를 버리고 도망쳤던 기억"


재택근무를 하는 프리랜서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 때나 전화를 걸어 몇 시간이고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친구도, 급한 일을 대신 좀 해달라고 떠넘기는 가족도, 내가 한창 바쁠 때 감기에 걸려 어린이집에 안 가게 됐다고 좋아하는 아이도, 내가 애를 보고 집안일을 하는 틈틈이 조금이라도 짬을 내서 '일'이라는 걸 해야 한다는 사정은 알아주지 않는다.



4) 임소연: 과학기술학 연구자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들과 살아가기"


양육 이야기 없이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이해가 가능하다고? 말도 안 된다.




5) 장하원: 과학기술학 연구자


"지식에 대한 생각을 바꾼 양육"


'모성'은 열 달 아이를 품고 있다고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찾아 배워야 실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렇듯 나는 다양한 종류의 지식과 정보의 세계 속에서 엄마로 커가는 동안 인간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하나가 아님을 알게 깨닫기 시작했다.




6) 전유진: 아티스트


"사라지는 마법으로 사라지지 않기"


어쩌면 출산은 공간뿐만 아니라 '나'라는 경계 자체를 허무는 경험인 걸까.




7) 박재연: 미술사 연구자


"여러 세계를 연결하며 살아가기"


엄마라서 뜰 수 있었던 또 다른 눈...
엄마가 되고 나서 그림에 대한 나의 태도가 조금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8) 엄지혜: 인터뷰어


"돌봄 노동을 태도가 말해주는 것"


'내가 어떻게 너를 키웠는데'라는 말을 안 할 자신이 없었기에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나를 위한 시간을 가졌다.



9) 이설아: 입양 지원 실천가


"돌봄이 필요한 이들이 서로를 끌어안을 때"


나는 감정을 돌보는 것이 곧 영혼을 돌보는 일이라 믿는다.




10) 김희진: 편집자


"양육 간증: 나를 잃었다 찾은 이야기"


매일 잠에서 깰 때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는 여자들에게
...
아이를 낳고 나서야 알았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쓸모와 가치를 입증하지 ㅇ낳아도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11) 서수연: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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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연 작품_ <돌봄과 작업> 중



'글 쓰는 엄마'로서 나는 시시각각 분열되고 흩어지는 가루와 파편을 모아 점묘화를 그리듯 글을 쓴다. 한 점 한 점찍어 그리는 점묘화는 일반 그림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대신 좀 더 밀도 높은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 물감을 팔레트에서 섞지 않고 화폭에 직접 순수한 색의 점을 하나하나 찍어나가다 보면, 다른 화가들이 보지 못하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섬세하게 볼 수 있다. 때로는 붓 대신 면봉이나 손가락으로 점을 찍어야 할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 책은 11명이 함께 작업해 출간한 책이다. 혼자 점을 찍는 일이 힘겨울 때는 함께 모여도 좋을 것 같다. 내 곁에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면 든든하고, 전체가 아니라 내가 맡은 구간만 책임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놓이기 때문이다.


한 점 한 점찍어가는 과정에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건 희미하고 추할지 모르지만, 언젠가 완성된 작품을 멀리서 본다면 지금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해 '돌봄'과 '작업'을 동시에 쥐고 있는 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작은 점들을 계속 찍어 나가기를, '돌봄'을 위해 '작업'을 포기했던 이들이 슬그머니 '작업'을 손에 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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