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많은 여름이>-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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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이사 온 집에 손바닥만 한 마당이 있다. 무슨 나무일까. 식물에 무지한 나는 마당에 있는 나무 위를 올려다보며 그의 이름을 궁금해했다. 날이 풀리고 따뜻해지자, 나무는 그제야 명함 한 장 건네듯 열매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핸드볼 크기의 노란 열매를 가르자 시큼한 흰색 과육이 나왔다. 중국에서 요우즈(柚子)라고 부르는 포멜로였다.
시든 과육 한 점 버리지 않고 포멜로 한 통을 말끔히 먹어치웠지만, 아무리 아끼는 열매라도 모두 소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시큼한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 식구들은 포멜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냉장고에는 먹기 좋게 잘라놓은 포멜로가 쌓여갔다. 우리 집에서 난 열매들은 결국 다 시들어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언제부턴가 마당에 떨어진 열매를 아예 집안으로 들이지 않게 되었다. 푸른 잔디밭에 떨어진 노란 열매를 마당의 장식물인 양 바라볼 뿐이었다.
지난 두어 달 우울감이 심했다. 겨우 손가락 염증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헤어스타일처럼 이유는 모두 사소했지만, 그로 인한 우울감은 많은 걸 놓아 버리게 했다. 손바닥만 한 마당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다. 무릎 위까지 올라온 풀도 많았다. 꼭 내 마음을 보는 것 같았다.
4개월 만에 잔디를 깎았다. 깔끔하게 머리칼을 잘라 단정해진 마당에는 포멜로 열매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잡초가 무성할 때는 보이지 않던 열매들이 햇볕을 받아 시들어가고 갈색을 띠며 썩어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내가 갖고 싶던 건 감나무였다. 파란 가을 하늘에 매달린 붉은 감은 바라보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단감이나 홍시, 곶감 등 다양한 방법으로 오래도록 열매의 달콤함을 즐기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하필 포멜로 나무라니. 포멜로는 시큼한 맛 때문에 다수가 좋아하는 과일은 아니다. 더구나 껍질을 벗기는 과정이 몹시 귀찮은 과일이다. 바닥에 뒹구는 포멜로를 바라보는데 마치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플롯이 바뀝니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 가능성으로만 숨어 있던 발밑의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김연수 <너무 많은 여름이> 중
김연수 작가는 소설에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빌려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 등장하는 광부들의 세계를 언급한다. 광부들의 세계처럼 몰라도 되지만 존재하는 세계를 인식하고, 두 세계 사이를 넘나드는 존재가 소설가라고 말한다. 창조는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에서만 나오는데, 조지 오웰이 광부들의 세계에 대해 말한 것도 바로 다정함 때문이라고.
제주 모슬포에서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책을 읽는 사람들을 만난 이후, 김연수 작가는 강연회보다 낭독회를 더 자주 하게 되었다. 그 저녁 마주쳤던 지친 얼굴들에 대한 작가의 다정한 마음이 낭독에 적합한 짧은 소설들을 창조하게 한 것이다.
“포멜로는 칼집을 내어 두툼한 껍질을 쓱쓱 벗겨내는 일도 쾌감 있고, 가위로 비닐봉지 열 듯 위를 따서 속껍질 속 알맹이를 꺼내는 것도 즐거워요.”
“포멜로는 누군가가 맛있게 먹지 않아도 그저 자라서 열매를 맺고 떨어져 씨를 뿌리는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게 아닐까요? 윤 작가님이 새벽에 깨어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스스로의 힘에서 연유한 것처럼.”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SNS에 올렸을 때, 예기치 못한 다정한 댓글이 이어졌다. 실은 소설 쓰기를 막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이유 없이 건네는 다정함 덕분에 내 안에 분명 존재했지만 몰랐던 어떤 세계를 여는 문이 열렸다. 더 이상 등단을 목표로 하는 소설을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쓰기로. 그때 책갈피 사이에서 선물처럼 엽서가 떨어졌다.
지금 여기에 잘못된 선택은 없습니다. 잘못 일어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좋아하는 일을 더 좋아하시길. 지금 여기에서 시작해 더 먼 미래가지 술술 나아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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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희 작가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책과 함께’와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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