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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Dec 21. 2020

불안이라는 위안

[책서평]

굳이 언어화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자신의 정서를 인식하는 일은 마음을 다루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소용돌이 안에 있으면 그 감정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마치 미로 속에 있으면 내가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멀리서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어디쯤인지 파악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격한 슬픔 속에 있을 때는 감정과 내가 분리되지 않고 ‘슬픔=나’의 상태이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 틈이 없다. 감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보면 객관적으로 인식이 가능하다. 이처럼 한 걸음 떨어져서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인식하는 것을 ‘메타무드meta-mood’라고 한다.


-매일 감정일기를 쓰다 보니 어느 정도 메타무드에 도달한 것 같다. 그렇다고 그런 감정이 아예 일어나지 않게 할 수는 없다. 화가 나면 화가 났구나! 우울하면 우울하구나! 이런 나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인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눈치 보는 사람들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은 이들이 공감능력이 높고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이라는 입장이다.


-눈치가 빠르고 공감능력이 높은 나는 참 민감한 사람이다. 그래서 피곤하고 예민하고 못 볼 것도 많이 보고 더 아프고 슬프고 그렇다.


자기비난은 결국 내가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 문제다. 반대로 자기자비의 태도는 내가 나를 지지해 주고 내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자기비난이 많이 줄기는 했지만 거의 자학에 가깝던 시절도 있다 보니 나에게 좀 더 관대해지고 싶다.


이름을 붙이면 감정은 본능의 영역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감정에 라벨링을 하자 그러면 감정이 객관화되고 거기에 덜 매몰되게 된다.


때로는 초라함 뒤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그들의 구구절절한 사연 속에서 귀중한 무언가를 볼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초라함 뒤에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잘 보이지도 않고 그러나 보는 노력을 계속하다 보면 보이지 않을까?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내면은 끝없는 고민과 두려움의 연속이었던 그의 얘기는 현시대의 우리 모습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겉과 속이 다른 나의 모습 같다. 마음이 아프다.


타인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비추어주고, 나 또한 타인의 모습을 비추어주는 역할을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타인과 마주해야 한다. ‘만남’을 통해서 내가 모르던 내 모습을 보고, ‘대화’ 안에서 나 자신에 대한 통찰을 얻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가 타인의 관심을 원하고 계속해서 누군가를 찾게 되는 이유는 나를 찾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치는 진짜 나를 찾기 위해서다.


-타인을 통해 나를 인지하고 알아간다. 사랑을 하면서 그 상대를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알아가는 과정 같다. 난 이런 사람이구나. 난 사랑 앞에 이 정도를 할 수 있구나...


혼자인 시간을 되도록 만들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으러 다니며 진짜 자아와의 시간을 갖지 않으려 한다. 그럴수록 더욱 타인의 인정에 매달리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자기false-self의 모습일 수 있다.


-여럿인 시간도 중요하지만 혼자인 시간도 중요하다.


자신의 내면을 마주한다는 건 실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자신의 결점, 시기심,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조금씩 늘려가다 보면 불편감은 차츰 평온함으로 바뀌어 갈 것이다.


-나를 알아가는 것은 평생에 걸친 여정인 것 같다. 나는 시시각각 변하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내일의 나 역시 다를 것이다. 이런 나를 매일매일 매 순간 관찰하고 보듬어 보자!


*총평

나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고 글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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