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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냐 Jan 31. 2024

연필을 사용하는 사소한(?) 이유

연필 애호가는 아닙니다.

나는 연필 덕후가 아니다. 샤프나 볼펜 등 다른 필기도구보다 연필을 선호할 뿐이다. 어느 날은 집에 놀러 온 친구가 책상 위에 있는 연필을 보더니 물었다.


"연필을 왜 쓰는 거야?”


연필을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여타의 필기도구보다 연필을 선호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친구에게 말한 이유들을 글로 자세히 풀어서 적어보려 한다.




1) 연필은 아름답다.

이게 무슨 억지인가 싶지만 연필의 여러 가지 미적 요소를 고려하면 납득이 된다. 연필의 형태를 자세히 살펴보라. 얄쌍하지만 안정적인 육각기둥 모양의 바디에 뾰족하게 깎인 흑연이 무심하게 달려있다. 볼펜이나 샤프, 만년필 등의 다른 필기도구와 달리 연필은 심의 끝과 바디가 끊김 없이 곧은 사선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매력이 느껴진다.


연필깎이로 깎은 연필과 칼로 깎은 연필은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가진다. 전자는 연필심과 바디의 매끈한 이음새와 그 끝에 달려있는 도발적인 연필심이 세련된 인상을 준다. 후자는 다소 투박한 형태가 친근감을 주고, 깎는 이에 따라 심의 모양이 모두 다르다는 점에서 유일함이라는 가치를 갖는다.


‘블랙윙’이라는 브랜드의 연필을 좋아한다. 연필 끝에 달려있는 지우개의 개성 있는 모양, 지우개를 감싸고 있는 은은한 금색 테두리의 광, 금박으로 각인된 블랙윙 상표로 인해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이다. 블랙윙 연필은 그 자체로 귀족같이 보인다. 이 연필을 사용하면 나도 따라 고귀해질 것 같은 느낌.



2) 연필 깎는 행위가 좋다.

심이 뭉툭해질 때마다 주기적으로 깎아야 하는 연필의 특성은 연필의 단점으로 언급되곤 한다. 하지만 나는 '깎을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 연필의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연필 깎는 걸 왜 이렇게 좋아하냐 하면...


우선 연필 깎을 때의 소리가 듣기 좋기 때문이다. 사람은 소리가 크지 않고 반복적이며 리듬감 있는 소음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장작이 타는 소리, 키보드 치는 소리,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러한 생활 속 소음을 이용하여 잠드는 것을 도와주는 ASMR 콘텐츠도 많다. 나에겐 연필 깎는 소리가 ASMR처럼 들린다. 칼로 깎을 때와 연필깎이로 깎을 때의 소리 모두 좋지만, 연필깎이로 깎을 때의 소리를 더 선호한다. 손잡이를 돌릴 때마다 나무와 흑연이 함께 깎이며 나는 '드르륵' 소리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다음은, 연필 깎을 때의 느낌이 좋기 때문이다. 연필깎이를 사용할 땐 몸통을 한 손으로 잡고 손잡이를 반대쪽 손으로 잡는다. 손잡이를 돌릴 때마다 몸통을 잡은 손과 손잡이를 돌리는 손 모두에 전해지는 잔잔한 진동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 연필 깎을 때 느껴지는 여유 또한 좋다. 연필을 쓰다 보면 필연적으로 하던 일을 잠깐 멈추고 연필을 깎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나에겐 이 시간이 버리는 시간이 아닌 쉬어가는 시간이다. 이때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비우게 되는데(명상과 비슷하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3) 필기감이 좋다.

연필을 사용하는 가장 실용적인 이유는 필기감이 좋다는 것이다. 연필의 심은 흑연으로 만들어졌는데, 연필심이 종이에 닿을 때의 그 서걱이는 감촉이 참 좋다. 종이와 촉의 마찰이 적은 부드러운 필기감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마찰이 만들어내는 서걱임이 매력적이다. 그러한 이유로 연필 중에서도 마찰이 적은 진한 심보다 연한 심이 필기감 면에서는 더 좋다.


필기의 결과물도 연필이 독보적이다.(라고 생각한다...) 다른 필기도구는 대부분 선의 굵기가 일정하다. 하지만 연필은 쥐는 힘의 크기에 따라, 심의 뭉툭한 정도에 따라 선의 굵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연필로 쓴 글에는 인간다움이 서려 있다. 또한, 연필로 그은 선에선 부드러운 느낌이 나는데, 이는 연필심이 눌리면서 닳기 때문이다. 반면 잉크를 사용하는 필기도구는 촉이 거의 닳지 않아 딱딱하고 날카로운 느낌을 준다. 나는 흑연의 희생으로 그어진 선의 포근하고 부드러운 맛이 좋다.




수많은 편리하고 스마트한 필기도구들이 쏟아지는 시대에 아직도 연필 사용을 고수하는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아날로그 인간인가 보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연필로 일기를 쓰고, 책에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그림을 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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