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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냐 Jan 29. 2024

나는 생각한다 고로 피곤하다

투머치띵커(too much thinker)의 고충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보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쉴 새 없이 가동되는 쓸데없는 생각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나의 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대개 부정적으로 흘러가게 되어있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찬 뇌는 이러한 생각들을 비워내기 버거워한다.


물론 나는 매사가 부정적인 인간은 아니다(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부정적인 생각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의 태도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항상 나의 생각들과 싸우며 사고의 균형을 찾으려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꽤나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다.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다양한 생각 중 비중을 크게 차지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1) 말에 대한 강박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지만 나의 기준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나는 말을 잘 못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말을 잘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어법적으로 정확할 것

말을 떠올리는 시간(뜸)이 길지 않을 것

발음이 정확할 것

군더더기 없고 논리 정연할 것

면접 기준 아니냐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말에 대한 스스로의 기대치는 너무 높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을 버리기가 어려운데, 그 이유는 나의 무의식이 이 기준을 따라 즉각적인 평가를 내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상적인 대화 상황에서 말을 할 때 나의 무의식은 알맞은 접속어(그런데, 그래서 등)를 썼는지, 완벽한 문장으로 마무리를 맺었는지, 말을 버벅거리진 않았는지 판단한다.

‘방금은 그런데라는 말이 부자연스러웠어'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말을 할 때 스스로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느낀다. 나를 평가하는 엄격한 면접관 앞에서 나는 자주 의기소침해지곤 한다.


말보다 글이 편하다는 자기소개도 거짓이 아님을 이해하실 것이다. 글은 충분히 생각해서 적고 만족스러울 때까지 수정할 수 있지만 말은 한번 뱉은 순간 끝이다. 언젠가부터 그 사실이 꽤나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신중하게 말해야지 생각은 하지만 대화 상황에서 항상 생각할 시간이 여유롭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횡설수설 말하고는 후회한다.


말이 아니라 글이 주가 되는 사회를 상상해 본다. 그 사회에서 좀 더 자신감 있는 사람이 될까, 글에 대한 새로운 강박이 생겨 괴로워할까.


2) ’왜‘라는 질문

인간관계와 관련하여 혼자 자주 하는 질문의 형태가 있다. '왜'라는 질문이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화를 낼까?‘

‘나는 왜 지금 속이 상하지?’

‘우리는 왜 이렇게 멀어졌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상황과 감정에 대한 원인을 찾도록 한다. 그런데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에 단 하나의 확실한 원인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이런 질문은 대개 결론이 내려지지 않고, 만일 결론이 내려진다 하더라도 그건 정답이 아니다. 간혹 이런 생각들이 스스로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런 생각들은 여러 가지 부정적인 효과를 낳는다.


- 부정적인 감정을 심화시킨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평소엔 아무렇지 않은 일에도 속이 상하거나 화가 날 수 있다. 이때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면 자연스럽게 사그라들 부정적인 감정을 끝까지 붙잡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부정적인 감정이 개입하기도 한다. 최악의 사고 과정은 이러하다.

'나는 왜 이 상황에서 화가 나지?'

'저 사람의 ~ 말 때문에 상처받아서 화가 난 것 같아.'

'왜 그런 말이 나에게 상처가 될까?'

'그 말이 나의 자존심을 건드려서 그래.'

'왜 저런 별거 아닌 말에 자존심이 상한 거야? 그냥 넘기면 되잖아.'

'그러게 나는 왜 이런 사소한 것에 자존심이 상하는 걸까...?'

...

이렇게 생각은 순환된다. 그럼 부정적인 감정이 해소되기는커녕 더 오래 지속되며 찝찝함, 자괴감, 우울함 등의 다른 감정과 결합되어 더 깊어진다.


- 타인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타인을 향한 '왜'라는 질문은 그의 말이나 행동의 기저에 있는 동기나 생각을 읽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타인을 향한 인과론적 질문에는 근본적인 오류가 있다. 사람들의 모든 말과 행동이 어떤 동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점, 어떤 이의 말이나 행동을 해석하는 주체가(즉, 나는) 철저한 타인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오류로 인해 타인에 대한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카카오톡 채팅을 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내가 보낸 채팅에 상대가 답장이 없으면 머릿속엔 자동으로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왜 답장이 없지...?'

이때부터 답장 없음이라는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추리가 시작된다.

'나와의 연락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나랑 연락하기 싫은 건가?'

'나를 별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나?'

온갖 추측으로 상대에 대한 오해만 쌓여간다. 실제로 그는 다른 일에 집중하느라 연락을 보지 못했을 수도, 바쁜 일 때문에 연락하는 걸 잠시 잊었을 수도 있다.


오해는 괜히 감정을 소모하게 만들고, 관계에 균열을 가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사람을 아주 피곤하게 만든다.


3) 과도한 자아성찰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항상(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에도) 드는 기분이 있다. 바로 찜찜함이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 '내가 너무 오버해서 웃었나?', '나를 너무 많이 보여준 것 같은데...'와 생각들을 하며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내가 한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떠올리고 타인에게 비추어졌을 나를 상상하는 일은 이후 발생할 수 있는 실수를 줄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는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를 부담스럽게 만든다.


자아성찰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일과 생활 속 모든 분야에서 활발하게 일어난다. 어떤 부분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내면의 감독관이 나를 다그친다.(안타깝게도 나의 감독관은 칭찬에는 박하고 호통에 능하다.) 정말 필요한 다그침보다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사소한 다그침의 비중이 더 크다는 점에서 나의 성찰이 과하다고 느낀다.


과도한 자아성찰의 원인은 자신에 대한 높은 기준인 것 같다. 높은 기준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 나의 오만함 때문인지 모르겠다.




글을 쓰면서도 내가 정말 피곤한 사람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그리고 너무 날것의 생각을 적은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다.

나이가 들며 더 많은 경험을 쌓아나가면 내면의 여유가 생기겠지. 그땐 지금의 글을 보며 '저 땐 참 피곤했었지' 생각하며 웃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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