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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냐 Feb 05. 2024

애독가가 당황하는 순간

그 질문만은...

친구가 집에 놀러왔다.

책장을 쓰윽 본다.

눈길이 가는 책을 뽑아든다(카뮈의 페스트였다).

그러곤 이렇게 묻는다.

(제발 그 질문은 하지 말아다오...)


“이 책 어떤 내용이야?”


이 질문을 듣는 순간 머리가 복잡해진다.

‘무엇을 말해야 할까?‘(소재? 주제? 줄거리?)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스포일러 포함? 비포함?)

‘얼마나 길게 말해야 할까?‘(친구가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 길게? 아님 최대한 간추려서?)


친구에게 최대한 만족스러운 답변을 해주고 싶은 욕심, 책읽는 사람으로서의 자존심(좀 민망하긴 하지만) 때문에 단순한 질문이 순식간에 복잡하게 변질된다.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이런 질문을 몇 번 받은 적이 있었다(책뿐 아니라 영화에 대해서도). 질문을 한 사람은 나를 평가하려는 의도에서 한 것이 아님에도 이런 질문을 들으면 묘하게 평가대에 선 느낌이다. 최대한 퀄리티있는 답변을 해서 질문자를 만족시키고 나를 입증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이라 할까.


그렇지만 질문한 상대방을 질책할 수는 없는 법!

나는 이 질문에 대처하는 나만의 방법을 만들었다.


‘~에 대한 책이야.’라고 한문장으로 대답하는 거다. ~안에는 이 책의 소재를 넣어서. 친구가 페스트에 대해 질문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흑사병이 퍼진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책이야.’


그럼 대답이 수월해진다. 이렇게 대답하면 상대방은 대체로 더 질문하지 않는다. ‘그렇구나~’ 하고 끝난다. 이 반응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건 상대가 진짜 그 작품이 궁금해서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니라 그 순간 할 이야깃거리가 떨어졌거나, 그냥 스몰토크 주제로 삼으려고 한 질문이니 부담스러워할 것 없다는 점이다.


그럼 책이나 영화에 대해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읽은 책이나 영화에 관심을 갖고 싶다면 이렇게 물으면 된다.


‘무엇에 대한 책(영화)야?’


이 질문은 대답의 범위를 작품의 소재로 한정시킨다. 그래서 일단 대답하기가 쉽고, 작품 이해 능력이나 예술에 대한 감식안 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음의 부담이 없다.


대화를 발전시키고 싶다면 질문을 더하며 그 사람의 취향과 가치관을 차근차근 알아가면 된다.


‘이 책에서 어떤 부분이 좋았어?‘

‘이 작가의 다른 책 읽어본 적 있어?’


등 감상에 대해 질문할 땐 구체적이고 차근차근 질문하는 게 좋다(물론 전적으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애독가 친구에게 이렇게 배려심이 잔뜩 묻어난 질문을 한다면, 애독가 친구는 마음을 활짝 열 것이다. 하지만 너무 마음을 연 나머지 책 이야기를 주절주절 하게 될 수도 있다.


타인의 세계에 관심을 갖는 건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 관심에도 섬세한 배려가 필요함을 느낀다. 당신의 세계가 궁금하지만, 그 세계 속에서 당신의 위치는 궁금해하지 않으며, 당신의 취향은 궁금하지만 그것을 단번에 파악하려는 성급함을 보이지 않는 그런 배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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