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이야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림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다. 이런 그알못의 시선을 사로잡은 화가가 있었으니, 바로 에드워드 호퍼이다. 호퍼를 처음 접한 건 교보문고의 예술 서적 코너에서였다. 여러 유명 화가들의 도록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띈 책은 호퍼의 책이었다. 표지에 그려진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본 순간 이 작가의 그림에 빠져들었다. 정신 차려보니 호퍼의 그림을 해설한 책을 사서 읽고, 전시회를 다녀오고, 호퍼의 작품이 그려진 휴대폰 케이스와 에코백을 사고 있었고, 호퍼 달력과 패브릭 포스터마저 집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호퍼의 그림은 어떤 매력을 가졌길래 이토록 사람을 강렬하게 끌어들일까.
1) 빛에 대한 독특한 묘사
호퍼는 빛과 그림자에 대해 끈질기게 연구하고 표현한 화가이다. 그만큼 호퍼의 그림에서는 빛이라는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 호퍼의 그림에서 빛은 그저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요소가 아니다. 어떤 작품에서는 빛이 주인공이며, 어떤 작품에서는 빛으로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거나 상황에 특수성을 부여한다.
<빈 방의 빛>은 창문을 통해 좁고 어두운 방에 빛이 들어오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호퍼 그림의 특징은 빛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빛이 사물의 표면에 달라붙어있는 것처럼 묘사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빛이 그림의 주인공이 되고, 빛으로 인해 밝혀진 사물이 아닌 빛 자체를 보는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빈 방의 빛>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에서는 불이 환하게 켜진 다이너에 네 명의 사람들이 있다. 주인, 남녀 커플,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앉은 남성. 가게 주인과 커플의 얼굴에는 환하게 빛이 드리워진 반면, 구석에 앉은 남성에게는 빛이 닿지 않아 어둡다. 이 남성의 표정이 보이지는 않지만, 이 그림을 본 우리는 단번에 이 남성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고독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남성의 감정에 이입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호퍼가 표정이 아닌 ‘빛’의 효과로서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펜실베이니아 탄광촌>에서는 탄광촌에서 일하던 한 남성이 홀린 듯이 빛이 비치어지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남성의 주위는 모두 어두운데, 한 방향에서만 빛이 비치어지니 이 빛이 어딘가 성스럽게 느껴진다. 이 빛의 실체는 무엇일까, 남성은 무엇을 본 걸까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남성이 빛과 관련된 특수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빛이 끊임없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이다.
2) 몽환적인 분위기
호퍼의 작품 중에서는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의 작품이 많다. 현실적인 듯, 그렇지 않은 묘사로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되는데, 몽환적인 분위기가 잘 드러난 몇 가지 작품들을 소개한다.
먼저 <오전 7시>라는 작품이 있다. 동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밝고 산뜻한 상점이 먼저 보이고, 그 뒤에는 어둡고 음침한 숲이 있다. 가지런히 정렬된 상점은 야성적이고 으스스한 분위기의 숲과 대비되어 지나치게 평온해 괴리감이 느껴진다. 그 괴리감으로 인해 이 풍경은 현실이 아닌 꿈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휴게실>에서는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긴 한 여성이 등장한다. 이 여성의 뒤에는 유리창이 있고 휴게실 조명이 유리창에 반사되어 보인다. 그런데 여성의 모습은 유리창에 반사되지 않았다. 이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 유령인가. 유령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진 것이 아닐까. 이러한 디테일로 <휴게실>은 여성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 아닌 초현실적이고 신비로운 작품으로 느껴진다.
<철길의 석양>은 가장 좋아하는 호퍼의 작품 중 하나이다. 전시회에서 이 작품을 마주하였을 때 눈물이 날 뻔했다. 그 어떤 석양도 이 작품보다 아름답지 않으리. 이 작품은 사실적인 풍경에 호퍼의 상상력이 더해져 그려진 것으로, 비현실적으로 화려하고 다채로운 모습을 지닌다. 현실에서의 석양과 달리 빨강, 노랑, 초록, 파랑이 순차적으로 그라데이션되어 환상적인 느낌을 주고, 경이감마저 불러일으킨다.
3) 적막과 고독
호퍼의 그림에는 대부분 고요하고, 쓸쓸한 느낌이 든다. 호퍼가 고독감을 자아내는 방법은 2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적막이 감도는 풍경 속에 우리를 끌어들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외로워 보이는 인물을 보여주어 그 감정을 함께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어느 쪽으로든 호퍼는 관객을 고독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른 일요일 아침>은 조용하고 여유로운 일요일 아침의 풍경을 나타내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건물엔 문을 연 상점 하나 없고, 지나다니는 사람이나 벌레 한 마리도 없다. 이 그림을 보면 마음이 평온해지면서도 문득 마음 한 구석에 쓸쓸함이 자라난다. 본래 왁자지껄해야 하는 곳을 나홀로 거니는 상황에 대한 이질감, 함께 이 상황을 공유할 사람의 부재를 인식한 순간부터.
<호텔방>에서는 한 여성이 침대에 앉아 우울한 표정으로 종이를 바라보고 있다. 고민에 잠긴 여성의 표정과 더불어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이 여성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성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여성이 느끼는 고독과 우울은 함께 느낄 수 있다. 또한 호텔방은 비좁고 짐으로 가득 차 있어 답답한 공기를 조성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심화시킨다.
이 글에는 책과 전시회에서 접한 해설과 나의 주관적인 견해 및 감상이 섞여 있다. 그러니 이 글에 나온 작품 해설은 정답이 아니며 엉터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호퍼 작품의 매력을 더 생생하게 느끼고 호퍼라는 작가가 더 궁금해지셨으면 좋겠다. 호퍼의 작품은 이미 유명하지만, 그의 작품이 더 많은 대중을 사로잡기를.
나는 항상 나의 폰케이스를 보고 호퍼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