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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선미 Jul 31. 2021

프리랜서를 후려치는 메일도 첫 문장은 멀쩡하다

어떤 일은 하고, 어떤 일은 하지 말아야 할까?

프리랜서를 후려치는 메일들도 첫 문장은 멀쩡하다.


"윤선미님 안녕하세요. ~에서 무슨 일을 하는 누구라고 합니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 일전에 저희 프로그램의 멘토로 자리를 빛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어서 어떤 일들을 해줬으면 좋겠는지 나열한다. 보통은 강의 제안이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일해줬으면 좋겠고 뭘 해주시기를 요청드리고... 설명이 길기도 길다. 중간에 프로그램에 대한 어필도 한 번쯤 한다.


"재미있는 행사를 기획하며 선미님께 진행을 제안드려보고자 합니다"


'이 행사가 재미있는 행사인지는 저에게 1도 중요하지 않고, 저의 재미는 순전히 페이에서 나옵니다'라고 속으로만 생각한다. '그래서 돈은 얼마나 준다는거야' 마우스 휠을 휙휙 재빠르게 돌린다. 터무니없는 시급을 써놨다면 이 메일을 읽는 시간도 아깝기 때문이다.


마우스 휠을 아래로 아래로 돌리면서 잠깐 딴 생각을 한다. 프리랜서에게 일을 맡기려면 '안녕하세요 :)' 전에 '시간당 얼마를 드리겠습니다' 부터 써야 한다는 법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예를 들면 이렇게.


'시간 당 100만원짜리 제안입니다.
안녕하세요 :) 윤선미님
어디어디에 누구입니다.'




마우스를 한참 내리다가 <보상> 이라고 쓰여있는 곳에 눈이 머문다.


<보상>

1~2차: 시간 당 6만원

3~5차: 시간 당 8만원


타닥타닥 계산기를 두드려본다. 각 회차당 2시간씩 총 5개 회차니까 10시간 수업이다. 그 중에 4시간은 시간 당 6만원, 6시간은 시간 당 8만원이다. '총 5회차의 수업을 라이브로 진행해야하고, 질의 응답 시간에 수강생들이 궁금해하는 분야에 대한 조언과 실무 팁을 전달하기를 기대'하면서 강사에게 주는 돈은 다 합해봐야 72만원이고 심지어 이건 세전일게 뻔하다. 준비하는 시간을 계산하면 최저임금이나 다를게 없다.


미련없이 답장을 쓴다.


타닥타닥.


"안녕하세요 :) 제안주셔서 감사하지만 이번 건은 어렵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윤선미 드림"




띠링. 답장이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보상 금액을 시간 당 15만원으로 조정하려고 합니다. 다시 검토 부탁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시간 당 6만원이라며 이제와서 15만원? 그새에 프로그램 예산이 두 배로 늘어난건 아닐테다. 이 회사는 높은 분의 결재가 밀렸다는 되도 안되는 핑계를 대며 한 달 가량 줘야되는 돈을 안 준 적도 있다. 너네는 지인짜 왜 그러냐.


이런 일은 생각보다 비일비재하다. 이 업체만 문제가 아니라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온라인 강의 계약을 하면서 시간 당 2만원 보수의 멘토링을 계약서에 은근슬쩍 끼워넣기도 하고, 말도 안되는 금액에 몇 시간짜리 강연을 맡기고 싶어하는 곳도 있다. 이건 어떻게든 강사를 싸게 쓰고 최대한 굴리겠다는 의지의 문제지, 프로젝트 예산이 크고 작고와는 상관 없다.


이제 막 프리랜서 일을 시작하던 시절에는 돈이 얼마든 나를 필요로 한다면 기쁘게 갔다. 아마 내가 거절한 저 일도 누군가는 6만원에 한다며 계약서에 사인을 했을 것이다.




계약서를 여러번 써보면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하나? 에 대한 나만의 기준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단순히 '돈을 많이 주는 일을 하고 돈을 적게 주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기준은 이상하다.


이슬아 작가는 2019년 <돈 얘기> 라는 칼럼에 "메일 작성에 소모되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서라도 첫 메일에 꼭 임금을 밝히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라는 말을 썼다.



이어서 이런 문단이 있다. 2019년의 이슬아가 청탁을 받는 기준이다.


3. 그제야 원고료(강연료)를 밝힌다. 하지만 터무니없이 적다.

→ 이 경우엔 다른 일들이 우선순위라 못 하겠다고 다시 답장한다. 원고 청탁의 경우 200자 원고지 기준 매당 1만 원 이하면 맡지 않는다. 강연이나 북 토크는 특별한 동기가 없으면 대부분 거절한다. 여러 사람 앞에서 많은 말을 하는 건 아슬아슬한 일이다. 그런 일방적인 말하기 시간마다 나는 몹시 송구스러워진다. 무대가 전장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다. 질의응답 시간에 어떤 뾰족한 질문이 누구에게서 날아올지 몰라서 염려하는 마음으로 강연을 진행한다. 집에 돌아오면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진다. 수십 명을 의식하느라 기가 흩어지고 마감을 위한 체력 또한 바닥난다. 그런 소진을 감수할 만큼의 강연료가 책정되어 있을 때에만 강연을 수락한다. 물론 고마운 사람들 혹은 미안한 사람들이 있는 자리는 적은 강연료로도 흔쾌히 일을 맡는다. 영리 목적이 아닌, 내가 소중히 여기는 주제로 기획된 행사 역시 시간과 마음을 내어 참여한다.


'소진을 감수할 만큼의 강연료'가 수락의 기준이다.


프리랜서로 일을 막 시작했을 때에는 나의 시간에 가치가 '매겨진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시키고 싶은 일을 기꺼이 했고, 줄 의향이 있는 가격을 받았다. 형편없는 시급을 받았던 그때의 나에게 없었던건 전문성이 아니라 주도권과 기준이었다.




나에게 들어오는 일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각 유형에 따라 나름의 기준을 세워봤다.


1. 터무니없이 적은 강연료로 얼굴과 커리어를 모두 팔아야 하는 일

→ "안녕하세요. 블라블라해서 어렵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윤선미 드림" 이라는 메일을 빠르게 쓴다. 메일을 작성하는 시간도 아깝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답장을 아예 하지 않거나 템플릿을 만들어두는 방법도 생각을 해봐야겠다.


2. 공짜 멘토링, 자문, 인터뷰

→ 답장 하지 않는다.


3. 나도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 대개 보상도 작게 마련이다. 내가 아니어도 대체제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위의 강연 제안이 여기에 해당된다. 물론 내가 진행한다면 정말 까무러치게 재미있고 감동까지 있는 수업을 만들겠지만(?) 강의 자료가 다 만들어져있다면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이런게 어렵다. 나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할 수 있으니까 하지 뭐' 하기 쉽다. 하지만 앞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런 일들은 잘 거절해나가려고 한다.


4.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 이런 일에 대해서는 자신감있게 높은 보상을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그 일을 잘 완성하기 때문에 높은 보상을 주면서 일을 맡긴 사람의 만족도도 높다. 나는 프로젝트 성공의 기쁨과 보상의 즐거움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5. 아직 잘 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지만 서로에게 도전적이고 재밌는 일

→ 파일럿 프로젝트로 가볍게 시작하기를 제안한다. 프로젝트 사이즈도 최대한 작게작게, 가벼운 예산으로 서로의 기대치를 낮춘다. 처음 호흡을 맞춰보지만 어느정도 신뢰관계는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양측에게 이 프로젝트가 재미있어야 할 수 있는 접근방법인 것 것 같다. 일단 작게 뛰어보고, 함께 뛰어본 경험이 만족스러웠다면 앞으로도 이 뜀뛰기를 계속할 것이라는 믿음도 있어야 한다. 첫 보수가 작기 때문이다.




솔직히 프리랜서를 너무 후려치는 일은 후려치는 쪽의 손해다. 그 프리랜서의 신뢰를 다시는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번 신뢰를 잃은 프리랜서는 '이만큼이면 이 일을 한다'는 가격표에 '너네랑 할려면 이만큼은 더 받아야 한다'를 더해서 계산기를 두드린다.


돈과 일의 기쁨, 성취 그리고 휴식을 잘 버무리는 중견 프리랜서가 되고 싶다. 그래서 이 직업을 좀 더 지속가능하게 만들고 싶다. 그리고 이슬아 작가와 같이 나도 다짐한다. 나는 돈 얘기를 확실히 하는 사람이 되자! 송금을 빨리 하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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