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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선미 Aug 17. 2021

짜이 한 잔에 여유 한 잔

2019년 2월 11일 여행 중 기록

! 이 글은 2019년 인도, 미얀마 여행을 하면서 썼던 기록을 브런치로 옮긴 것입니다.


인도는 무엇보다 여유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하는 장소였다. 인도 사람들이 여유로웠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 당장 여유를 찾지 않으면, 이 지옥 같은 마음을 어떻게 견뎌내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여유를 찾고 싶을때마다 짜이를 한 잔씩 사 마셨다. 길 위에서 오 루피, 십 루피를 주고 산 뜨거운 짜이를 마시다보면 그 전과는 다른 생각들을 할 수 있었다.


여유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캄캄한 새벽에 콜카타 공항 벤치에 앉아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나 자신이다. 손잡이가 없는 벤치를 찾아 누워서 쉴수도, 바닥에 침낭을 펴놓을수도 있었을텐데 굳이 그 작은 벤치에 엉덩이만 걸치고 조는 듯 마는 듯 하기만 했다. 조바심 때문이다. 지금 자도 어차피 세네시간 뒤면 일어나야 할텐데 뭐, 좀 불편해도 그냥 이렇게 버텨보자. 낯설고 불편한 이 환경에서 지금 앉은 이 자리만이 안전한 장소인 것처럼 느끼면서 무릎을 몸 쪽으로 당기고 시간아 지나가라 빌었다. 


나 같은 사람이 있는가하면, 처음 던져진 환경에서도 일단 침낭을 펴고 그 공간을 완벽하게 자기 공간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흘러가는 시간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그런 사람은 쉬는 것도 더 잘 쉰다. 나는 이 차이가 여유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항상 그 여유를 가지고 싶었다. 복잡하고 혼란하고 낯선 환경에서도 약간 멀리 떨어져서 상황을 바라보고, 그 공간을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 그건 아마 경험에서 나오는 자신감, 천성, 주어진 것을 대하는 자세, 습관 그 모든 것인지도 모른다. 



난 종종거리는 사람이었다. 여유라는건 잘 몰랐다. 항상 무언가를 준비하고있었고,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고, 침대에 누워있는 주말은 휴식과 동시에 죄책감이었다. 여행도 그렇게 했다. 국내 여행을 가더라도 왔다갔다 티켓부터 숙박, 카페, 음식점까지 모든 걸 결정 해놓아야 마음이 편안했다. 계획에 없던 일은 잘 하지 않았다. 그래도 짜이는 필요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것들은 내 예상대로 흘러갔고, 계획한 일은 틀어지는 법이 잘 없었다. 불안한 상황을 겪는 일도 흔하지 않았다. 여유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태국을 여행하면서 희미하게 그런 생각을 시작했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여유로울까. 호스텔에서 만났던 스무살 미국 남자애는 대학에 안가고 여행중이었다. 대학에 갈 생각도 없어보였다. 국립공원에서 일을 했는데 일이 너무 재미가 없었다고, 근데 뭘 해야할지도 잘 모르겠어서 일단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그럼 꼬따오 이후에는 어디로 가? 하고 물었는데 아직 정해진게 없다고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고 그랬다. 거기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금전과 시간이 주는 여유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돈과 시간이 있다고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있는건 아니다. 그리고 생각없이 빈둥빈둥 사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건 삶, 상황, 환경을 바라보는 여유였다.


인도 동북부 여행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콜카타에서 실리구리로 넘어가 네팔 여행을 하고 다시 인도로 돌아와 주요 관광 도시들을 여행해보겠다는 목표로 열심히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의미없어졌다. 앞으로의 여행을 어떻게 굴려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떻게 가야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채로 떠돌아다니는 우리에게, 외국인 관광객에게 익숙하지 않은 인도 사람들은 종종 무례했고 차가웠고 나쁘게 굴었다. 거짓말에 속고속아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 내버려졌을 때도 있었다. 같이 여행했던 동행자는 날이 지날수록 종종 날카로워졌다. 난 그 때마다 짜이를 사마셨다.



콜카타에서 구와하티로 가는 스물 여섯 시간 기차 안에서 마셨다. 뼈가 시리게 추웠던 타왕으로 올라가는 길에 나무를 태우는 난로 앞에서 마셨다. 태즈푸르의 전통시장 입구에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마셨다. 곰팡이가 가득했던 최악의 호텔 앞에서 마셨다. 최악의 호텔 바로 다음날 갔던 최고의 호텔 방에 앉아 마셨다. 동행인에게 '네 화를 나한테 풀지 않았으면 좋겠어'하고 진심을 전한 뒤, 그녀의 화난 뒷통수를 뒤로 하고 마셨다. 쉐어택시가 출발하기를 한 시간 기다리고 한 시간을 더 기다리면서 마셨다. 뜨겁고 단 짜이를 마시고나면 여유 비슷한 걸 찾을 수 있었다. 200mm 렌즈로 줌을 해서 보던 세상을 11mm 광각 렌즈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래, 한시간쯤 더 기다릴 수 있지 뭐. 그래,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보지 뭐. 그래, 이건 지나갈 일이지 뭐. 하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관대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영 정이 안 가던 장소도 짜이 한 잔이면 마치 내 집 앞처럼 느낄 수 있었다. 



콜카타 공항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시간을 견디던 그 때에 짜이 한 잔이 있었다면 공항 바닥에 침낭을 깔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짜이는 순간의 여유를 찾아줬다. 순간의 여유와 그 여유가 주는 영감을 수없이 지나다보면 언젠간 살아가는 여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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