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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영 Oct 13. 2022

몰라봐 주셔서 되려 감사합니다

공동현관 비밀번호가 바뀌었다.


적응기간이 필요하다.

익숙한 비밀번호부터 누르다가

한번 틀리고 나서야 '아 맞다!' 생각하고 고쳐 누르곤 한다.


신기하게도 오히려 상윤이는

바뀐 비밀번호를 가르쳐준 이래 틀린 적이 없다.

이렇게 간헐적 똑똑함을 뽐낼 때면 나 역시 도치맘이라

'혹시 얘 사실은 천재인데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올라가려는데

공동현관에서 이미 비밀번호를 여러 번 틀리셨는지

곤란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서 계셨다.


"아, 여기 얼마 전에 비밀번호가 바뀌었어요."

설명해 드리고 문을 열어 드렸다.


"고마워요. 아들네 왔는데 예전에 적어둔 비밀번호가 계속 틀리더라고.

아들은 전화가 안되고..."


한 번 말이 오고 가면

짧은 순간에도 의외로 많은 정보들을 서로 공유하게 된다.

말을 섞었고 가정사를 알았으니 이미 우리는 이웃사촌이 되었다.


그리고 아이가 있으면 늘 예상하는 그런 순간이 온다.

"안녕? 잘생겼네. 몇 살이야?"

당연히 관심도 없고 대답도 없다.

숨이 막힌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싫어서 1층으로 이사했는데,

지금껏 살면서 잘한 일 중 한 가지다.

고층이었다면 이런 숨 막힘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겪어야 했을 것이다.


이럴 때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매번 답을 찾지 못하고 갈등한다.

1번. 상윤이에게 "상윤아, '8살이에요.'라고 해야지." 말하도록 시킨다.(학교를 유예하며 또래 친구들 나이로 인지 시켜서 상윤이는 아직 자기 나이가 8살인 줄 안다.)

2번. 그냥 둘의 대화니 끼지 않고 민망한 미소 지으며 모른 척한다.

3번. "죄송해요. 이 아이가 장애가 있어 아직 말을 잘 못해요."라고 시원하게 오픈한다.


사실 정해진 것은 없다.

물어보는 사람의 태도, 느낌, 그냥 그때그때의 나의 감정에 따라 셋 중 하나 반응한다.

가장 많이 쓰는 반응은 1번이다.


1번을 선택하면,

"우리도 요만한 손자가 있어." 혹은, "아이고 잘생겼네." 아니면,

"8살이나 됐으면 남자가 씩씩해야지! 부끄러워하면 쓰나!" 하고 반응하신다.

보통 할머니들은 , 할아버지들은 후자의 반응을 많이 하신다.


아마 우리 집이 고층이었다면 "상윤아, ~라고 해야지."라고 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니

결국 3번 반응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것이다.

그러나 보통은 "아이고 잘생겼네!" 하시고 나면

"다 왔다. 상윤아 내리자. 안녕히 가세요." 하고 마무리가 된다.


2번은 거의 선택하지 않지만, 

간혹 내 기분이 정말 안 좋을 때는 누구랑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선택할 때가 있다.

그러나 애고 보호자고 대답하는 이 없으면

"왜 대답을 안 해? 너 몇 살이야? 허허 어른이 물어보는데 대답해야지."

라는 반응으로 돌아오고, 결국엔 또 3번알려드려 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결국 돌고 돌아도 3번 반응으로 귀결됨을 알지만 

처음부터 아이의 장애를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초면에 굳이 거기까지 알려야 되나 싶은 마음이 제일 크고,

다음으로는 장애를 이야기했을 때 더 불편한 분위기가 되는 것을 지금껏 경험해왔기 때문이다.


그야 당연히 나는 아이의 장애에 대해 몇 년 동안이나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 온 사람이지만

상대방은 장애 이야기에 면역이 없는 무방비 상태일 텐데,

초면에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들으

누구라도 당황해서 허둥대는 법이니까.

당연히 한국인인 줄 알고 말 걸었는데 갑자기 영어로 대답이 돌아올 때의 당혹감처럼.


그럼에도 내가 이번엔 그분의 물음에

"죄송해요. 저희 아이가 장애가 있어 말을 잘 못해요."라고

바로 이야기했던 것은,

잠깐 동안의 대화였지만 그분의 말투와 표정에서 다정함과 예의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그 부분은 제가 몰랐어요. 실례했습니다."

그분 역시 매우 당혹스러워하셨다. 자꾸만 죄송하다 하셨다. 

비밀번호도 계속 틀려 곤란을 겪으셨던 분께 또 당혹스러움을 안겨 드렸다.

속으로 '오늘 하는 일마다 왜 이런 걸까.' 생각하고 계시진 않으셨을까?


는 웃으며

"아니에요. 괜찮아요. 죄송하신 일 아니에요." 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런데 나조차 상윤이와 급하게 엘리베이터를 내리면서 허둥대다가

"몰라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해버렸다.

잠깐 동안 둘 다 벙쪄 있었다. 문이 닫혔다. 


'내가 뭐라고 한 거지? '몰라봐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게 맞는 거야?'

생각을 해 보고, 

또 해보고,

다시 생각을 해봤는데,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이상하긴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잘했다.


장애 아이와 다니면서 하루에 수십 번 바라는 그것.

우리 아이가 다르게 보이지 않는 것.

시선을 끌지 않는 것.

특별하게 보이지 않고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것.


그렇게 몰라봐 주시고 말씀 걸어주신 것은 감사한 일이 맞는 거다.


그러니 부디 부탁드리옵건대,

앞으로도 계속 몰라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도 몰라보도록 노력해볼게요.






그거 아세요?

제가 느끼기에,

당신은 다정하고 사려 깊고 예의 바른 사람이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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