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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os May 24. 2023

가르침의 눈물

기억 속 그 아이는 항상 해맑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와 만남을 가진 해[年]는 두 번이었습니다.


처음은 2002년 고3 때 담임교사와 학생 간의 만남이었고, 그다음은 처음 만난 지 10년이 지난 2012년 대중매체(TV와 신문기사)에서 그의 이름 세 글자와의 만남이었습니다.  






1년 내내 (운동장 쪽) 1분단 맨 앞자리에 앉았던 '허. 정. 석.'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바로 옆 자리에는 1년 내내 정석이를 도와주는 '김경록(가명)'이라는 더 멋진 이름을 가진 아이가 있었습니다.


내 기억 속에 정석이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앓고 있는 근육병 때문에 심하게 뒤틀린 몸과 얼굴로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눈망울은 밝고 환했습니다. 저는 우리 반에서 윤리 수업을 할 때면 잊지 않고 정석이에게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미소 지으면서) 정석이 자고 있니?"


"(바로 대답을 못하므로 몇 초의 시간이 흐른 뒤) 아.. 니.. 오.."


"음 다행이군. 나는 또 정석이가 너무 조용해서 자고 있는 줄 알았지?"

"정석아! 근대 철학 사상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했는데, 정석이가 생각하는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한데?"


"(심하게 몸을 비틀면서 한참을 생각한 후에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대답한다) 네 선생님. 존재하는 것의 조건은 생각하는 것이라는 것 같습니다. 마치 제가 몸이 불편하여 휠체어와 친구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생각만은 누구보다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인 것처럼 이요."


"(놀란 표정을 하면서) 우와~ 모두 박수.  봤지? 너희들처럼 머리를 폼으로만 달고 있는 녀석들과는 차원이 다른 정석이의 말이다. 배워라 배워!"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내 기억 속에 정석이 곁에는 항상 휠체어를 밀어주는 김경록이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경록이는 또래 학생들에 비해 나이가 많이 들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가끔 '정석이 형'이라고 농담을 했습니다.

경록이는 중학생 때부터 정석이와 항상 같은 반이었고 고등학교도 정석이를 따라(또는 경록이를 따라) 같은 학교로 진학을 했습니다. 아무리 선한 성품을 지닌 아이라도 이렇게 몇 년 동안 장애를 가진 학생을 돌볼 수는 없습니다.

더욱 생생한 기억은 정석이도 항상 웃는 얼굴이었지만 경록이도 이에 못지않게 늘 미소 짓는 학생이었습니다. 표정만 밝은 게 아니라 생각 자체가 긍정적인(더 나아가 낙천적인) 사고를 지녔습니다.


"경록아 매일 학교에서 휠체어 밀고 다니고 야외 활동 할 때도 함께 다녀야 하는데 힘들지 않아?"


"(미소 지으면서) 네 힘들지 않아요. 저는 괜찮아요."


언젠가 경록이와 진학 상담을 할 때 경록이는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래 경록이는 어느 대학에 가고 싶어?"


"저는 00 대학 사회복지학과를 가고 싶어요. 그런데 고민이 있어요."


"그래 뭔지 말해봐."


"제가 대학엘 가면 정석이랑 떨어져야 하잖아요. 그래서 정석이랑 같은 대학에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있어요."



경록이의 말을 듣고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경록이는 더 심성이 고운 아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중학생부터 지금까지 정석이를 도운 학생이었는데 그 의무감과 책임감이 경록이의 어깨를 많이 짓누르고 있었구나 하는 담임교사가 아닌 기성세대로서의 미안함과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그 무게는 또래 학생인 네가 짊어질 무게가 아니라 우리 어른이, 우리 사회가, 법과 제도를 만드는 정치인이 짊어져야 할 무게이고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정석이와 경록이는 서로 다른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2012년 10월 어느 날.


저녁 식사 후 소파에 앉아 TV 뉴스를 보고 있는데 어느 국회의원이 중증장애인 故 허정석 씨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면서 중증장애인을 위한 '활동보조서비스 기본급여 확대'를 촉구한다는 앵커의 멘트가 들렸습니다.


순간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앵커의 입에서 나온 허정석 씨는 낯익은 이름이었습니다.  


"어 이상하다. 허정석은 예전 우리 반 학생이었는데, 동명이인인가?"


설마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신문기사를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이름만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중증장애인' 그리고 'ㅇㅇ' 지역이 내가 알고 있는 그 학생과 일치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나이가 '30세'였습니다. 2002년 고3 담임을 할 때 우리 반 학생 허정석이 맞았습니다.


신문기사에는 '활동보조인이 퇴근하고 난 후 인공호흡기가 빠지는 사고로 숨을 쉬지 못해 생을 마감했다'라고 나왔습니다.




당시 어떤 심정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정석이와의 고3 시절의 추억은 끊어진 필름처럼 조각조각 기억이 나는데, 정석이의 죽음을 알았던 순간은 기억이 없습니다. 이게 바로 선택적 기억상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마 그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많았습니다.


고3 담임을 하면서 수능성적표를 나눠줄 때 노력한 것보다 성적이 잘 안 나온 학생이 눈물을 흘릴 때 저도 같이 울었습니다.


무단결석을 많이 하는 아이와 상담을 하면서 부모가 이혼을 한 후 마음 붙이고 살 때가 없어 이리저리 방황하는 아이를 보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습니다.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해 심한 정신적, 심리적 상실감과 충격으로 울고 있는 학생을 보면서 함께 슬퍼하며 울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석이의 죽음을 접한 그 당시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나오지 않던 눈물이 가끔, 문득문득 그 아이가 생각날 때가 있는데 이때 눈물이 나옵니다.


정석이의 죽음 이후 중증장애인을 보호하는 실질적인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아직도 언론에서 장애인을 위한 실효성 있는 보호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떠들고 있는 걸 보니 예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는 것 같아 속상하기만 합니다.


그날 바로 알았으면 장례식장에 가서 정석이 마지막 가는 길 담임 선생님이 이렇게 널 보러 찾아왔다고 말해주었을 텐데 하는 진한 슬픔이 남아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건강한 몸으로 그 당시 3학년 2반 정석이의 해맑은 웃음을 마음껏 보여주며 살기를 바랍니다.






아래 글은 정석이가 쓴 죽기 4년 전 그의 나이 27살 2010년에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중증장애인에 대한 실질적인 보호책을 강구해 달라는 호소문입니다.







@ 20년 전의 기억을 소환하여 쓴 글이라 세세한 부분에서는 사실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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