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thos May 14. 2023

나는 스승일까? 선생일까?

'청출어람', 이것이 바로 스승의 날에 보답하는 길이다.

나는 스승일까? 선생일까?



"선생님! 교실에 한 번 가보세요. 반 학생들이 스승의 날이라고 뭔가 잔뜩 준비해 놨어요."


"허허 ~ 난 교실에 안 가. 그냥 1교시 수업이나 들어갈 거야."


"그래도 선생님, 아이들의 성의를 봐서라도 모른 척하고 아침 조회 들어가 보세요."


"아닙니다."



(잠시 후 3학년 1반 반장이 담임 선생님을 모시러 교무실에 왔다)


"선생님, 아침 조회 왜 안 해주세요? 우리 반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


"선생님이 조금 바빠서 오늘은 조회 생략할 테니 너희들도 1교시 수업 준비해"




오늘처럼 5월 15일 스승의 날만 되면 생각되는 분이 있습니다.

곧 정년을 앞두고 있는 선배 교사였는데, 예순이 넘은 나이임에도 학생들에게 인기가 엄청 많은 국어 교사였습니다.

대체로 학생들은 젊은 교사를, 학부모님들은 경력이 어느 정도 있는 중년 교사를 좋아합니다. 나이와 경력이 많은 교사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젊고 혈기 왕성한 청소년들을 가르치기에 힘에 붙인다는 선입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선배 선생님은 예외였습니다. 학년 초가 되면 학생과 학부모님들은 노년의 이 국어 선생님이 담임교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보충수업을 하면 제일 먼저 이 선생님의 수업이 마감되었습니다. 이 분과 딱 일주일만 생활해 보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나이는 생물학적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분이란 걸.


일단 학생들의 코드에 딱 맞게 재미있는 수업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교과서 내용의 핵심을 잊지 않고 전달합니다. 당신이 살아온 삶의 경험과 지혜를 아이들의 코드에 맞춰 이야기하시는데, 공개수업에 들어가 참관을 해보면 학생들처럼 수업에 빠져들어 1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집중해서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 선생님은 동료교사들이 당신 수업을 보고 싶으면 언제든 들어와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어찌나 제자들과 사제지간의 정이 돈독한지, 방학만 되면 졸업한 제자들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전국일주를 할 정도였습니다. 강원도 정선에서 전라도 해남까지. 그의 수첩에는 동료교사의 연락처는 거의 없고 졸업한 학생들의 연락처만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고3 담임을 많이 하셨는데 졸업식날에 딱 한 마디만 하신다고 합니다.


5월 첫째 주 토요일에 한국고등학교 정문에서 오후 1시에 만나자!


나를 선생으로 기억하고 있는 녀석들은 잊지 않고 이날 찾아오겠지 하는 생각에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는 당신 반 학생들과의 약속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압권은 선생님의 정년퇴직날이었습니다. 지금은 교직사회도 많이 바뀌어서 퇴직 기념식을 하지 않거나 아주 조촐하게 선생님들끼리만 진행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후배 교사들이 정성껏 준비하여 가시는 길 섭섭하지 않게 해 드렸습니다.

선생님은 교장선생님께 당신 퇴임은 자기가 다 알아서 할 테니 학교 체육관만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장소만 빌려달라고 하는 이유를 퇴임식 당일 알았습니다.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기념일을 준비한 것입니다. 거의 40여 년을 교단에 있었으니 얼마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제자들이 있었겠습니까? 맛있는 뷔페 음식, 입담 좋은 사회자, 가수와 밴드 등. 뭐 하나 부족할 게 없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제자들이 기꺼이 자발적으로 준비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 선생님을 소개할라치면 오늘 하루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아무튼, 저는 이렇게 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선생님이 왜 반 아이들의 스승의 날 축하 파티(?)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께 그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선생님 반 아이들이 준비한 스승의 날 축하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하하하. 우리 김 선생님이 많이 궁금했나 봅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저는 '스승'이 아니라 '선생'이기 때문입니다."


"네? 선생이 곧 스승이 아닌가요?"


"다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요. 하지만 저는 이 둘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학생들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이고 스승은 지식뿐만 아니라 삶의 지혜까지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다른 분은 몰라도 제가 알고 있는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인생의 지혜를 충분히 가르치고 계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가요? 저는 스승이 아닙니다. 삶의 지혜를 가르치되 입으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의 인생 자체도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저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 스승보다는 선생으로 불리길 더 좋아합니다."


"..."






씁쓸한 스승의 날…“다시 태어나도 교사” 5명 중 1명뿐
"다시 태어나도 교사 선택?"…스승의날 기념 설문 결과 '충격'
'스승의 날'에도 웃을 수 없는 교사들 "교권 회복은 언제"
'스승의 날 맞아'…교사 96% "교권 회복 조치로 민‧형사상 면책권 부여"
제42회 스승의날, 갈수록 만족도 떨어지는 교사들
스승의 날 앞두고…교사 10명 중 2명만 '교직 만족'
교사 5명 중 1명만 '다시 태어나도 교직 선택'…만족도 추락


2023년 5월 15일 스승의 날에 신문사들이 뽑은 제목들입니다.

제목만으로 독자의 눈에 띄어야 하는 신문사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모두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내용들입니다.


1998년 처음 교탁 앞에 선 이후 단 한 번도 교사인 걸 후회한 적 없던 제가 최근 들어 후회까지는 아닐지라도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고 떳떳하게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밝히는 것을 꺼려한 걸 보면 교직만족도는 과거에 비해 많이 떨어진 것이 사실인가 봅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누구를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시대가 변했고 아이들이 변했고 학부모가 변했고 우리 교사들도 변했으니까요.


혹자는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시대의 요구를 담아내지 못한 정체된 교사 문화를 탓하기도 합니다. 백 프로 동의는 못 하지만 어느 정도 인정은 합니다. 다만 우수한 교사들이 모인 집단이 왜 이런 문화가 됐을까? 하는 것은 함께 고민해봐야 합니다. 그 원인을 교사만 탓하기엔 억울한 면이 많습니다.  


'21세기 학생들을 20세기 교실에서 19세기 교사들이 가르친다"

(너무 단정적이고 논리성이 없는 표현이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왜 19세기 교사가 됐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 이유를 교사에게 자율성을 부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책임만 강요하는 시스템과

많은 요구에 상응하는 대우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학교에서 교사의 자율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즘 교육계에서 새롭게 뜨는 화두가 '교사별 교육과정'입니다. 교사 각자가 교육과정을 재구성하여 학생을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게 현실적으로 쉽지가 않습니다. 교사 한 명 한 명의 개별 평가권이 인정되지 않고 입시위주의 교육환경에서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입니다.

그에 상응하는 대우 부족도 교직사회의 정체의 원인입니다. 이 대우라는 것이 경제적인 대우일 수도 있고 교권에 대한 대우일 수도 있습니다. 제 주변에서도 젊은 교사들이 사표를 내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사표 내는 이유는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교직사회의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는 데에서 찾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만두는 교사들이 눈에 띄는 수치가 아니지만 이대로 가다간 더 늘어날 수도 있고, 결국 지금처럼 우수한 사람들이 과연 교사가 되려고 할까? 하는 회의감이 듭니다.  








2003년에 개봉한 차승원 주연의 영화 '선생 김봉두'를 기억합니다.

도시에서 촌지를 받다가 걸려서 시골분교로 강제 전보 당한 교사의 이야기입니다. 과거에는 촌지를 받은 교사들이 있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없습니다(없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시골에 사는 동생이 이번 스승의 날에 선생님께 작은 선물 하나 해드려도 괜찮냐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안 된다고 했습니다. 동생은 자기 자녀에게 너무 잘해주시는 분이라 꼭 보답을 하고 싶다고 하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말은 안 했지만 아이들을 잘해주는 것은 우리 교사의 당연한 일입니다.




많은 선생님들은 5월 15일 스승의 날이 없어졌으면 합니다.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도 불편해하는 그런 기념일을 뭐 하라 챙기느냐고요. 씁쓸한 교직사회의 한 단면입니다. 정부는 스승의 날만 되면 몇몇 선생님들에게 포상과 표창을 줍니다. 선생님들은 이런 표창 안 줘도 되니 걸맞은 대우나 제대로 해주길 바랍니다.








'나는 스승일까? 선생일까?'


지천명의 나이임에도 아직은 스승보다는 선생인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인생의 지혜를 입으로만 전달해 주는 사람도 스승이라 한다면 스승이 맞겠지만, 본보기로서의 내 삶을 반추해 보면 아직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교실에서 수업할 때 늘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너희들은 선생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푸른색은 쪽이란 풀에서 나온 것이지만 쪽풀보다 더 푸르고(靑取之於藍 而靑於藍)"
"얼음이 물이 변해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갑다(氷水爲之 而寒於水)" - 순자의 '권학 편'


선생은 쪽풀이고 물이지만, 너희들은 장차 커서 쪽풀보다 더 푸르른 사람, 물보다 더 차가운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것이 오늘 같은 스승의 날에 십시일반 코 묻은 돈을 모아 케이크이나 선물 사주지 않아도 나에게 보답하는 길이란다.


많은 선생님들이 원하는 스승의 날의 바람은 지금 가르치는 아이들 모두 자기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일 겁니다.


청출어람(靑出於藍)




* 추신


오늘 아침에 학생자치회 학생들이 모두 나와 출근하는 학교 선생님들 모두에게 상장을 주었습니다. 상장 제목과 내용이 다 다릅니다. 의미 있는 것은 교사뿐만 아니라 학교에 있는 모든 분들께 상장을 수여하였다는 것입니다. 급식실 직원, 행정실 직원, 청소해주시는 여사님들, 사회복무요원까지, 작은 장미꽃 한 송이와 함께요. 


학생들이 직접 수여한 상장입니다. 교감인 저에게는 '봉사 끝판왕상'이라는 상장을 주었습니다.




https://brunch.co.kr/@yoonteacher/185

위 글 관련 아이가 저에게 준 스승의 날 선물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가장 소중하고 귀한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전 09화 가르침의 눈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