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성 지능을 지닌 혜교를 위하여...
"혜교야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
"얘들 밥 먹고 나오는 거 쳐다보고 있어요."
"아~ 그런데 왜 쳐다보는지 물어봐도 될까?"
"그냥 쳐다보는 게 재밌어요."
혜교(가명)라는 아이가 있다.
600명이 넘는 학생들 중에는 유독 눈에 띄는 아이들이 있다. 주로 키가 아주 크거나 아주 작은 아이, 신발을 요일별로 바꿔 신는 아이, 볼 때마다 '충성'하고 독특한 인사를 건네는 아이, 교복을 아주 단정히 입고 공손히 인사하는 아이, 매 수업시간마다 복도에 나와 배회하는 아이 등등. 내 눈에 띄는 아이들은 저마다 이유가 있다.
혜교는 내가 이 학교에 부임하는 첫날부터 눈 길이 가는 아이였다.
그 나이 또래 여학생들이 긴 생머리를 하는 것과는 달리 단정하게 머리를 묶고 옷차림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모든 단추를 다 잠그고, 한쪽 신발끈을 풀고 다니는 요즘 학생들의 유행과 달리 늘 단단하게 신발끈도 묶고 다니는 학생이다. 가방은 흔한 학생용 양쪽 어깨에 메는 가방이지만 항상 오른쪽 주머니에는 텀블러가 왼쪽 주머니에는 휴대폰이 들어 있다. 이 스타일은 작년 3월 1일 처음 본 순간부터 변함이 없다.
혜교의 시선은
늘 사람의 얼굴을 향해 있는데 한 번이라도 그 아이와 눈을 마주친 적이 있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력을 지님을 알 수 있다. 그 아이가 내뿜는 마력은 그 짧은 순간에 눈으로만 수만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꾸 말을 걸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는 눈이다.
"참 혜교야, 지난주에 방과 후 수업 수강 신청을 받았는데 좋아하는 수업 신청했어?"
"네 신청했어요."
"그래 무슨 과목을 신청했는데?"
"피구, 농구, 배드민턴, 배구 4개 신청했어요."
"헐~~ 4개 과목이나 신청했구나. 그런데 수강인원이 정해져 있을 텐데..."
"피구만 빼고 나머지는 인원에 못 들어가고 대기자 명단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선생님 저 농구, 배드민턴, 배구 모두 모두 하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참 혜교는 욕심도 많다. 2개도 아니고 4개나 신청하고. 너도 잘 알겠지만 운동 종목은 인원이 정해져 있어서 너무 많은 학생들을 받을 수는 없을 거야. 그래도 선생님이 한 번 부탁해 볼게"
(참고로 코로나-19 이후 학습이 뒤쳐진 학생들을 위하여 방과 후 수업의 모든 비용을 국가가 지급해주고 있다. 그래서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도 마음 편히 수업을 신청해서 듣는다. 참 좋은 정책이다.)
"네"
다른 학생들은 방과 후 수업을 하면 대부분 진학에 도움이 되는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과목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그런데 혜교는 체육 과목만 4개를 선택했다. 혜교가 이런 선택을 한 이유를 나는 잘 알고 있다.
혜교는 경계선 지능에 있는 아이다.
당연하지만 학교에는 있는 아이들의 지능, 성격, 정서, 인격, 재능의 스펙트럼은 너무 다양하다. 교육의 본질은 프리짐을 통과하는 빛이 같은 것 같지만 모두 같지 않은 고유의 색을 지닌 것처럼, 학생 하나하나가 지닌 고유의 색을 인정하고 이해하여 그 색에 맞는 옷을 본인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즉 결을 따르는 교육을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교육의 현실과 일반 대중의 사고는 아이의 다양한 빛깔 중에 지능만을 강조하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만 관심과 집중되어 있다. 극단적으로 성적이 우수하지 못한 학생들은 우리 교육 현실에서 늘 주변인이 될 수밖에 없다.
혜교는 그 주변인에도 포함되기 어려운 아이다.
혜교의 눈빛은 항상 누군가와 대화하길 원한다. 그것도 오래오래.
그래서 혜교는 본인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을 보면 너무너무 좋아한다. 행여 상대방과 대화가 끊길까 봐 노심초사하고 하나의 주제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주제로 대화를 아주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나도 처음에는 이런 혜교의 능수능란한 대화 기술에 속아서(?) 회의에 늦게 들어간 적도 있다.
"(다짜고짜 다가와서) 선생님 저 도서관에서 책 빌렸어요."
"어 그래 잘했네"
(바빠서 그냥 가려고 하자)
"그런데 선생님 제가 어떤 책 빌렸는지 아세요?"
"(바쁘지만 어쩔 수 없이 대답한다) 아니, 무슨 책 빌렸어?"
"네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책을 빌렸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무슨 책 좋아하세요?"
이런 식으로 혜교는 한 번 문 대화 상대자를 절대로 놓아주지 않는다.
처음 만나는 아이들이나(특히 처음 보는 저학년 학생들) 선생님들이 표적이 된다. 선생님과 한 번 대화를 시작하면 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찾아와 대화를 하려고 한다. 그래서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혜교가 교무실에 들락날락하면 "선생님 축하드려요. 오늘은 혜교가 선생님을 픽! 했나 봅니다. 하하하!"라고 농을 친다.
이런 혜교의 행동은 경계선 지능에 있는 아이들의 특징인 낮은 지능 때문이다. 학습이 많이 느리다 보니 교과 진도에 뒤쳐지게 되고 함께 하는 모둠별 학습이나 프로젝트 학습도 따라가지 못하게 된다. 친구들 속에 끼지 못하니 효능감과 자신감이 떨어져 결국 낮은 자아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쉬는 시간에 대화 상대자를 탐색하는 혜교를 우연히(?) 만났다.
"혜교야 안녕! 혜교야 방과 후 수업은 어떻게 됐니?"
"선생님 저 신청한 수업 모두 됐어요. 그래서 월화목금 내내 배구, 농구, 피구, 배드민턴을 배울 수 있어요."
"그래 참 잘 됐다. 열심히 해서 나중에 멋진 운동선수가 되거라!"
"근데 선생님 피구는요????"
"아 미안 혜교야 선생님이 급한 볼 일이 있어서 나중에 얘기하자"
혜교의 아쉬운 눈 빛이 마음에 걸리기 했지만 교장인 나보다 또래 학생들과 이야기하는 상황이 더 많아져야 혜교한테 좋을 것 같아 얼른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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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얼마 전 혜교와 점심시간에 나눈 대화에서 혜교가 방과 후 수업 4개를 신청했는데 하나만 되고 나머지는 대기자 명단에 들어갔다는 말이 마음에 걸려 방과 후 수업을 하는 선생님에게 이렇게 부탁을 했었다.
아이들을 위하는 마음이 통했는지 선생님들이 힘든 와중에도 거의 모든 대기 학생들을 받아주었다. 이 학생들 중에 '혜교'가 있었다.
고3 담임을 많이 했을 때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내 청춘을 받쳤음에도 졸업하면 연락도 없는 아이들이 그렇게도 야속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나 또한 자식을 키운 부모가 되니 이런 내 마음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굳이 보상이라면 제자들이 졸업해서 작더라도 행복을 느끼는 삶을 사는 평범한 사람이면 그걸로 됐다.
혜교도 그렇다.
다음은 이 글과 관련된 참고자료입니다.
1. 결을 따르는 교육?
https://brunch.co.kr/@yoonteacher/139
2. 경제선 지능이란?
‘경계선 지능’은 지능지수(아래 IQ) 71~84 사이에 해당하는 지적능력을 일컫는다. 경계선 지능인은 전체인구의 12~14%에 해당한다. 현행법상 지적장애 기준은 IQ 70 이하다. 이들은 문자 그대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선’에 놓여있다.
출처 : 연세춘추(http://chunchu.yonsei.ac.kr)
* 사진 출처 : https://www.blessedtree.me/entry/%EA%B2%BD%EA%B3%84